2012년 12월 26일 수요일

로지스틱

로지스틱 방정식 (logistic equation)은 생태학에서 개체군 성장의 단순한 모델로 고안된 미분 방정식, 또는 차분 방정식을 말한다. 혼돈이론의 초기 연구 대상의 하나로 연구되어 현재는 생태학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응용되어 쓰이고 있다.


개체군 증가 모델

생물의 개체수에 관한 연구는 개체군생태학 분야에 속한다. 인구 추산이나, 해충 발생에 대한 예상 등 이용가치도 있어 오래 전부터 연구되고 있었다. 많은 생물에서는 실제 생존하는 것보다 많은 자손을 만들기 때문에 그들 전부가 살아남는다면 개체수는 지수적으로 증가한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는 다르다.

일반적으로는 생물개체수는 정수값을 갖고, 많은 경우 번식은 특정 시기에 일어나기 때문에 개체수 증가는 연속적이 아닌 단계적인 형태를 띤다. 그러나 수학을 간단하게 하기 위해 그 증가도 개체수도 연속적인 값을 갖도록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보통 한 부모가 만든 자손의 수는 대략 일정하므로, 증가율을 r로 하면 개체수 N의 증가율은


로 쓸 수 있다. 이 방정식의 해는 지수곡선이 되어 짧은 시간에도 인구폭발을 일으킨다. 이러한 개체군 성장 모델을 생물개체의 증가가 기하급수적이라고 지적한 것이 맬서스이기 때문에 맬서스적 성장으로 부르기도 한다. 현실의 생물은 특정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고, 그곳에서 생활할 수 있는 개체수의 상한선이 정해져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곧, 개체수가 많아지면, 그 증가율은 낮아지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현실적인 개체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성질을 갖는 식이 필요하다.
  • 개체수 0에서 증가율은 0이다.
  • 개체수가 증가함에 따라 증가율은 감소한다.
  • 환경의 수용가능 한계 개체수를 K라고 하면 N=K일 때 증가율은 0이 된다.

로지스틱 방정식의 내용

로지스틱 방정식은 1838년 Verhulst가 고안해 냈다. 그는 인구증가를 설명하는 모델로 이 식을 고안한다. 이후 독자적으로 같은 식을 제시한 생태학자가 있어 이후 개체군생태학의 기본적인 수학모델로 자리잡는다. 이 식은 위에서 제시한 조건을 모두 만족한다.

실제 식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K는 환경수용력, 즉 그 특정 환경에서 살 수 있는 개체수의 정원이다. 는 내적 증가율로 부르며, 그 생물이 도달할 수 있는 최대 증가율이다. 실제 증가율은 N이 K이 가까워지면서 감소하고, N이 K과 같아지면 0이 된다. 개체수가 K보다 큰 값을 갖으면, 증가율은 마이너스가 되어 개체수가 K가 될 때까지 감소한다.
또 여기서 K = k/r 로 두면,


로 쓸 수 있다. 이 경우 k는 한 개체의 증가에 따라 증가율이 감소하는 비율을 나타낸다.

이 식으로 그래프를 그리면 처음엔 작았던 개체수에서 시작한 그래프는 다음번엔 급히 상승했다가, 떨어졌다를 반복하며 일정한 값으로 수렴하는 시그모이드 곡선의 형태가 된다.


생물학적 해석

로지스틱 방정식 자체는 생물학적으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


●  모델에서 개체수의 증가가 연속적이다. : 대다수 생물에서 특정 시기에만 증가가 일어난다. 특히 곤충등 세대가 겹치지 않는 종은 개체수증가는 세대별로 단계적으로 생긴다.

●  모델에서 개체수증가가 증가율을 억제하는데 부모와 아이의 개체가 같은 비율로 억제에 관련된다. : 대다수 생물에서 부모와 자식은 크기가 다르므로 이러한 일은 있을 수 없다. 어떤 곤충은 부모와 자식은 서로 생활의 장소부터 다른 것들도 있다.

●  모델에서 개체수의 증가는 증가한 순간부터 증가율에 영향을 준다. : 물론 실제론 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부모와 자식은 크기와 생활의 장소 자체가 다경우도 있어, 개체수의 증가가 증가율에 영향을 주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예가 적지 않다.


따라서, 로지스틱식을 단순하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은 거의 크기에 차가 없는 형태로 증식하며, 언제나 증가하고 있는 세균이나, 세대가 완전하게 겹치고, 번식기가 확실치 않은 사람과 같은 것에 한정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러 생물의 개체군 연구에서 로지스틱식은 개체수변화의 기본적 모델로서 이용되어 많은 성과를 얻었다.

이 식에서 r은 그 종에게 가능한 최대의 증가율이며, 이 값이 클수록 빠르게 증식 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K 값은 그 환경하에서 생존할 수 있는 개체수의 상한을 나타낸다. 고립된 섬의 생물을 연구하는 도서생태학 분야에서, 맥아더와 윌슨은 섬 생물 개체군의 정착과 멸종을 논해 정착의 성공에는 큰 r을 갖는 것이 중요하고, 멸종되지 않으려면 큰 K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하며, 각각을 r도태K도태 라고 불렀다.이것이 r-K전략설,나아가 생활사 전략론의 시작이 되었다.

또, 이 식을 차분 방정식의 형태로 했을 경우, K의 값을 어떻게 주느냐에 따라 개체수는 안정된 K의 값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K 위아래 2개의 값 사이를 반복하거나 혹은 4개의 값의 사이를 왕래하는 결과가 나온다. 덧붙여 이 식을 한층 더 연구하면 비주기적으로 모든 값에 이르는 경우까지 도달하는 여러가지 형태가 출현하며, 이는 혼돈이론 초기의 주요 연구대상 중 하나였다.


<출처 : 위키피디어>



2012년 12월 7일 금요일

박정희란 누구인가 (친일인명사전)


박정희
 
박정희 朴正熙│高木正雄, 1917~1979
만주국군 중위
1917년 11월 14일 경상북도 선산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고령이다. 1926년 4월 구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32년 3월 졸업했다. 1932년 4월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하여 1937년 3월 심상과(尋常科)를 제4기생으로 졸업했다. 1937년 4월 경상북도 문경면의 문경공립보통학교(1938년 문경서부심상소학교로 개칭) 훈도로 부임해 1940년 2월까지 근무했다.

훈도로 재직 중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하였으나 일차 탈락하고 재차 응모하였는데, 당시의 정황이 만주지역에서 발행되던 일본어신문인 《만주신문(滿洲新聞)》 1939년 3월 31일자에 〈혈서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로부터〉라는 제목으로 상세히 보도되었다. 
 
기사 전문에는 “29일 치안부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공립소학교 훈도 박정희 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증명서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고 피로 쓴 반지(半紙)를 봉입(封入)한 등기로 송부되어 관계자(係員)를 깊이 감격시켰다.
 
동봉된 편지에는 ‘(전략)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두렵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아무쪼록 국군에 채용시켜 주실 수 없겠습니까. (중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중략)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후략)’ 라고 펜으로 쓴 달필로 보이는 동군(同君)의 군관지원 편지는 이것으로 두 번째이지만 군관이 되기에는 군적에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고 군관학교에 들어가기에는 자격 연령 16세 이상 19세이기 때문에 23세로는 나이가 너무 많아 동군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중히 사절하게 되었다.”라고 하여 군관학교 지원의 동기와 좌절된 사연을 미담으로 소개했다.

기혼자인 데다가 연령 초과로 입학 자격이 문제되었으나 다시 도전하여 결국 1939년 10월 만주 무단장시(牡丹江市)에 소재한 제6군관구 사령부에서 4년제 만주국 초급장교 양성기관인 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 제2기생 선발 입학시험을 치르고 1940년 1월에 15등으로 합격했다. 만계(滿系 : 日系 외 통합분류) 합격자 240명 중 조선인은 11명이었다. 

자격 제한의 벽을 넘어설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사자의 강고한 지원 의지와 함께 대구사범학교 재학 시 교련 배속장교로 있다가 전임하여 신징(新京) 교외 제3독립수비대 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관동군 대좌 아리카와 게이이치(有川圭一 : 1945년 6월 오키나와에서 전사)의 추천, 그리고 대구 출신으로 신경군관학교 교관부에 일시 근무하고 있던 간도특설대 창설요원인 강재호 소위(만주국 중앙육군훈련처, 세칭 봉천군관학교 4기)의 도움이 있었다. 

1940년 4월 신경군관학교 예과과정에 입교해 제3련(連) 제3구대(區隊)에 소속되어 군사교육을 받고 1942년 3월 졸업했다. 졸업식에서 일계 2명, 만계 2명과 함께 우등생으로 선정되어 만주국 황제 푸이(溥儀)가 하사하는 금장 시계를 은사상(恩賜賞)으로 받았다. 

예과 졸업 후 타호산(打虎山)에 있는 제6군관구 예하 제5단(第五團) 제3영(營) 제8련(連)에 파견되어 2개월간 조장(組長)으로 부대실습을 한 후 다시 관동군 보병 제30연대 일명 다카다(高田)부대에 파견되어 3개월간 실습을 마쳤다.
 
1942년 10월 성적 우수자로서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편입했다. 1944년 4월 일본육사 제57기와 함께 졸업한 뒤 견습사관으로서 소만(蘇滿)국경 지대의 관동군 23사단 72연대[치치하얼(齊齊哈爾)에 주둔한 관동군 635부대라고도 한다]에 배속돼 2개월여 근무한 후 같은 해 7월 만주국군 제6군관구 소속 보병 제8단으로 옮겨 배장(排長 : 소대장)으로 근무했다. 같은 해 7월 하순경부터 8월 초순까지 제8단의 2개 대대가 일본군과 합동으로 팔로군을 공격할 때 소대장으로 작전에 참가했다.

1944년 12월 23일 일본군 소위로 예비역으로 편입됨과 동시에 만주국군 보병 소위로 임관하였으며, 보병 8단으로 부임해 단장의 작전참모 역할을 하는 을종(乙種) 부관 겸 부대의 단기(團旗)를 책임지는 기수로 근무했다.
 
옌지(延吉)에서 조직된 8단은 간도지구경비사령부 히노 다케오(日野武雄) 소장이 편성한 히노지대(日野支隊)를 기반으로 출발하였으며, 처음에는 주로 동북항일연군과 소련에 대한 작전을 수행했다.
 
1938년 7월 말부터 두만강 유역 하산호(湖) 일대에서 벌어진 국경분쟁에서 일본군이 소련군에 패퇴하는 장고봉(張鼓峰)사건이 발생한 이후, 만주국 국경경비대를 해산하고 국경경찰대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만주국군 잔류를 원하는 군인들을 기간으로 히노지대를 신설했다. 히노지대는 장비와 전투력이 우수하고 대원들의 일제에 대한 충성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아 8단의 주력으로 재편되었다.
 
1943년 8단은 중국 관내의 팔로군을 공격하기 위해 러허성(熱河省) 칭룽현(靑龍縣)과 싱룽현(興隆縣) 일대로 이동해 쭌화(遵化) 인근의 팔로군 11·12단(團)에 대한 작전을 전개하는 한편 집단부락정책을 실시했다. 1944년 4, 5월경부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8단은 칭룽현 서남부의 반벽산(半璧山)을 중심으로 남북 지역에 산재한 팔로군과 교전했으며, 이때 을종 부관으로 8단 예하 각 부대에 작전 지침과 명령을 하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8단에 근무하던 조선인 출신 장교로는 배장 방원철(신경군관학교 2기)과 제1영 본부의 이주일(신경군관학교 1기, 일본육사 56기 해당)이 있었으며, 뒤이어 신현준(봉천군관학교 5기)도 간도특설대에서 8단 연장(連長 : 중대장)으로 전입해 왔다. 
 
1945년 7월 만주국군 중위로 진급했다. 1945년 8월 보병 8단 예하 각 부대는 둬룬(多倫)으로 진출해 소련군의 진격을 저지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고 8월 10일부터 이동을 개시해 8월 17일 싱룽에 집결했다. 이곳에서 일본이 패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8단의 중국인 군인들에 의해 신현준 등과 함께 직위에서 해임되고 무장을 해제당했다. 같은 해 9월 팔로군의 지휘를 받는 제8단과 함께 미윈(密雲)으로 이동한 후 이곳에서 8단을 떠나 신현준·이주일 등과 함께 베이핑(北平 : 베이징)으로 가서 과거 일본군이나 만주국군 출신 조선인들을 중심으로 편성된 광복군 제3지대 주(駐)평진(平津)대대의 제2중대장을 맡았다. 1946년 4월 평진대대가 해산한 후 5월 초 톈진(天津) 탕구(塘沽)항에서 미국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했다. 

1946년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朝鮮警備士官學校 :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여 3개월의 단기과정을 마치고 12월 14일 제2기로 졸업하면서 조선국방경비대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경비사관학교 생도로 재학할 당시 형 박상희가 대구10월사건으로 경찰에게 살해되었다. 이 사건을 전후해 남로당의 군 내부 조직원으로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1947년 4월 조선국방경비대 제8연대(연대장 : 원용덕) 제4소대장으로서 38도선 경비를 맡았고, 9월 대위로 진급했다. 1947년 10월 육군사관학교 중대장으로 부임해 8월 소령으로 진급했다. 
 
1948년 10월 19일 제주 4·3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도로 출동하기로 되어 있던 여수와 순천의 제14연대가 이를 거부하고 무장봉기를 일으키자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 발탁되어 전라남도 광주에 있는 호남지구전투사령부에서 작전참모로 근무했다. 같은 해 11월 11일 군내 남로당 프락치를 적발하는 ‘숙군(肅軍)사업’을 담당하던 제1연대 정보주임장교이자 육군 정보국 요원인 김창룡 대위(관동군 헌병 오장 출신)에 의해 남로당 군 내부 프락치 혐의로 체포되었다.
 
수사 과정에서 좌익 혐의 사실을 순순히 시인하면서 군내 남로당 조직원들의 명단을 제공하고 ‘숙군사업’에 적극 협력한 점을 인정받아, 1949년 2월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면하고 ‘파면·무기징역·전(全) 급료 몰수’ 선고를 받았다. 이후 재심에서 징역 15년으로 감형받았다. 육군본부 정보국의 숙군 책임자인 백선엽 육군본부 정보국장(봉천군관학교 9기 출신), 김안일 육군본부 정보국 제3과장(SIS), 김창룡 1연대 정보주임 등이 연대 신원보증을 하고 원용덕(만주국군 군의 중교 출신) 등 만주국군 출신은 물론 일본 육사 인맥들이 적극 구명운동을 해 사형을 면했다. 재판 중에도 육군본부 정보국 1과(전투정보과)에서 근무하다 1949년 4월 18일 형집행정지와 함께 군에서 파면되었다. 
 
육군본부에서 비공식 문관으로 근무하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7월 소령으로 육군본부 작전정보국(국장 : 장도영) 제1과장을 맡으면서 현역으로 복귀했다. 이후 제9사단 참모장, 육군정보학교 교장,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차장, 제2군단과 제3군단 포병단장을 역임했다. 1953년 11월 준장으로 진급하였으며, 다음해 도미하여 6개월간 오클라호마주 포트실육군포병학교에서 고등군사훈련과정을 이수했다. 1954년 6월 미국에서 귀국한 뒤 제2군단 포병사령관, 육군포병학교 교장 겸 포병감을 지냈다. 
 
1955년 7월 제5사단장이 되어 1956년 7월까지 처음으로 일선 전투부대 지휘관으로 복무했다. 1957년 3월 육군대학을 졸업했다. 곧바로 제6군단 부군단장으로 전보되었다가 9월에 제7사단장으로 임명되어 1958년 6월까지 복무했다. 1958년 3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고, 같은 해 6월 제1군 참모장으로 보임되었으며, 1959년 2월부터 11월까지 제6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1960년 1월부터 7월까지 부산의 육군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으로 재임했다. 4·19혁명 후 민주당이 집권한 제2공화국 정부 아래서 1960년 7월 제1군관구 사령관에, 9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에 임명되었다가 12월 제2군 부사령관으로 전보되었다.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권력을 장악했다. 1961년 5월 군사혁명위원회 부의장이 되었고 계엄부사령관·계엄사무소장·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을 거쳐 7월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했다. 1961년 8월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고 3개월 후인 11월 육군대장이 되었다.
1962년 3월부터 육군 대장으로서 대통령 권한대행과 내각 수반을 겸하다가 1963년 8월 정계에 진출하기 위해 예편했다. 1963년 9월 민주공화당 총재를 맡았고, 1963년 10월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 후보에 신승(辛勝)해 12월 17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1967년 제6대 대통령에 취임한 후 장기집권을 위해 1969년 9월 3선 개헌을 단행하고 1971년 7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72년 10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유신헌법을 공포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간선제로 바꾸면서 유신체제를 구축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를 통해 제8대와 제9대 대통령에 당선했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저격을 받고 사망했다. 김영삼 대통령 재임 당시 5·16군사쿠데타는 불법이라고 공식 규정되었다.
 

[참고문헌]
《朝鮮總督府及所屬官署職員錄》 ; 《(滿洲國)政府公報》 1940.1.6 ; 《滿洲新聞》 1939.3.31 ; 《滿鮮日報》 1942.3.24 ; 《滿洲日日新聞》 1942.3.24 ; 《每日新報》 1944.4.22 ; 《朝鮮日報》 1949.2.17 ; 《京鄕新聞》 1949.2.17 ; 《서울신문》 1949.2.18 ; 《東亞日報》(호외) 1963.10.13 ; 《평화일보》 1948.11.10 ; 《滿洲國軍誌》(1987) ; 《韓國戰秘史》(兵學社, 1977) ; 《悲劇의 軍人들》(1982) ; 《陸士卒業生》(중앙일보사, 1984) ; 黃世霖, 〈憂患中的往事〉, 《皚皚長白-僞滿軍校學生回顧錄》(吉林省靑年運動工作委員會, 2000) ; 《韓國出身 日本陸士·滿洲軍校同窓生名簿》(1975) ; 《僞滿軍事》(吉林人民出版社, 1993) ; 申鉉俊, 《老海兵의 回顧錄》(1989) ; 《現代韓國人名辭典(合同年鑑 67年版)》(1967.1) ; 《실록 군인 박정희》(2004) ; 〈한일관계의 미래-CIA 보고서〉 1966.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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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에 실린 박정희 친일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