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21일 월요일

종교적 체험과 자율신경계

편도체에 들어앉은 하나님


라캉은 의식과 무의식도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말한다. 생각, 사고, 잡념, 고민, 걱정, 불안 등도 대뇌피질 전두엽에서 직간접적 경험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전두엽에 구조화된 의식은 동물뇌, 정서뇌라 불리는 변연계(특히 편도체)에 영향을 주고 걱정, 불안, 안도, 평안함 등을 일으킨다.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생각은 일종의 강박증, 노이로제, 집착증인데, 프로이드는 종교를 '집단신경증'이라 했다.

기도, 명상, 수련, 참선 등은 이런 전두엽의 논리적, 언어적 사고를 중단하고 우리 의지와 독립된 자율신경계를 안정상태로 조절해서 평안에 이르는 게 하는 방법들이다. 자율신경계를 우리 의지대로 조정하는 방법은 '호흡법'밖에 없는데, 그래서 명상, 참선 등을 행할 때 자신의 호흡에만 집중하는 것이 그런 연유에서다.

과거에 슈가레이 레너드라는 복서가 있었는데 이 선수의 반사 신경이 얼마나 빠른지 보통사람의 2배 정도였다고 한다. 옛 무사들의 지독한 수련은 반사신경을 증진시키 위한 것이었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칼놀림. 대뇌에서 보고 판단하고 명령을 내리기 전에 척수에서 명령을 내려버린다. 이것은 척수반사다. 훈련에 따라 운동선수들의 반사신경은 보통사람보다 2배 정도 증진시킬 수 있다고 한다.



깨달음, 무념무상, 견성, 종교적 체험은 대뇌피질, 전두엽의 논리적, 언어적 사고를 끊고 스스로 뇌의 변연계가 관장하는 자율신경계를 컨트롤 할 수 있다는 것의 다른 말이다. 이런 조절능력은 훈련, 수련을 통해 충분히 가능하다.

어떤 종교적 깨달음이 반드시 좋은 것인지는 이론이 있을 수 있다. 깨달음의 댓가로 전두엽의 논리적, 언어적 사고를 중지한 것이기에 구체적 삶의 변화를 합리적으로 판단하기에는 훈련이 부족하고 현실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능력은 저하될 수밖에 없다.

현실문제와 연관된 전두엽의 추리능력을 포기했으므로 당면한 가족사나 정치 경제 사회 문제에 대한 판단능력이 떨어지므로 현실 괴리감이 발생할 수도 있다. 흔히 현실감각이 없다, 현실도피자, 이상주의자, '도튼 중' 같다는 말을 듣곤 한다. 득도, 영성, 구원을 받을 것인지, 범부로 생활세계를 이성적으로 따져가며 살 것인지는 선택의 문제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행위와 구조가 일으키는 부조리를 논리적 사고로 판단하는 것을 '불의'라 할 때, 불의에 분노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불의 때문에 화병이 나는 것도 문제다. 이 둘을 잘 조절하는 것이 동서고금의 교육원리(지덕체의 함양)다. 이 둘을 잘 조합한 이가 누구였는지는 잘 모르지만 성인으로 추앙받는 이들이 그들이 아닐까.

"깨달았다“, ”성령의 은사를 입었다“, ”견성을 이뤘다"는 말의 다른 말은 전두엽의 언어적, 논리적 사고행위를 중단하고 자율신경계의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게 충분히 훈련 받았다,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바꿔 말하면 현실세계를 언어적, 논리적으로 엄밀하게 파악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도 된다.

한 개인의 명상체험과 종교적 체험은 소중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개인적 체험만으로 무리하게 현실세계를 해석하려할 때, 전두엽 사회에 편도체 조절자가 무리하게 끼어들 때 문제가 발생하곤 한다. 개인적 특이체험의 일반화는 맹신과 독단을 낫는다.“일본지진은 예수를 믿지 않아서", “도를 아십니까”, “어리석은 중생들”이라는 말을 함부로 뇌까리는 것에서 그런 행태를 볼 수 있다.

필자는 아무래도 배부른 달마대사 보다는 가난한 인간이 낫지 싶다. '인간'이란 말에서도 나타나듯이 나란 존재는 타인의 얼굴을 통해 형성된, 연대하는 주체(레비나스)이기 때문이다. 괴롭고 고통스럽긴 하지만, 전두엽의 탐구와 비판, 문제해결 등에서 얻는 '성취감'이라는 놀라운 재미를 포기하면서까지 '자율신경계 조절자'가 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하나를 얻으면 분명 하나를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종교적 행위는 대부분의 무신론자들도 일상적으로 행하고 있다. 꽃꽂이, 낚시, 여행,모형수집, 뜨개질, 바둑, 개키우기, 연필 돌리기, 책수집, 연예인 팬활동, 악기연주, 음악감상, 트위터질 등. 일상에서 매일 반복되는 특정행위,징크스, 집착, 소아병적 애착 또한 일종의 종교적 행위(E-프롬)일 수 있기에, 타인에 해가되지 않고 내가 즐거워 하는 일의 달인이 될 수 있다면 이것 또한 성스러운 종교행위가 아닐까. 생활자체가 도 닦는 것, 기도하는 것이라는 말, 참으로 일리있다. 천국과 도가 뇌의 편도체에 있는 것이라면, 도는 산에 있지 않고 길에 있으며 천국은 너의 마음 속에 있고 한 곳에 머물지 아니하고 도처에 편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나를 깊이 들여다본다는 것은 나의 살아있는 동물성 Vital Sign을 느껴 본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전두엽에서 논리적, 언어적으로 표상된 경험을 반영한 변연계의 감정의 소용돌이를 조용히 지켜본다는 것이고, 자율신경계가 나를 어떻게 난도질하는지 유심히 바라보는 것이다.

기도를 통해 구원을 얻고 싶거나 명상을 통해 도인이 되고 싶거나 참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싶다면 ‘호흡’에 집중하면 된다. 호흡이야말로 내 의지로 자율신경계에 접근하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10년만 하면 소원성취할 것이다. 근데 그런 종교적 결단 없이 범부들도 10년 정도 한 가지 일에 매진한다면 그 분야에선 누구나 달인, 도인이 될 수 있다.

천국과 도를 구함에 있어서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없다. 차이가 있다면 한쪽은 100년 동안 아름다운 자연 다큐멘터리 영화 한편만 줄창 보는 반면, 한쪽은 액션, 스릴러, 미스테리, 멜로, SF, 드라마 모든 영화를 입맛에 맞게 다양하게 골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끝)



...

댓글 2개:

  1. 얼마전에 종교적 체험이 측두엽 이상에서 비롯된 것일 지도 모른다는 다큐멘터리를 봤었기에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더 많은 글 기대할게요.

    답글삭제
  2. 글 잘봤습니다. 위의 글을 과학적으로 접근하기엔 저로선 부족하지만 불교의 교리를 접목해봤을때 전두엽의 활성화는 혜(慧)에 해당되는며, 자율신경계 화성화는정(定)에 해당되어 그 어느것에도 머물지않는 것이 중도입니다.
    定(깨달음)이 강조되는 것은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이 존재의 근본인양 알고있기때문입니다. 생각을 끊을 수 있고, 생각을 자유롭게 할수 있는 것이 불교가 지향하는 중도적 삶입니다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