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 잡는 방법 3가지
1)쥐덫
쥐덫은 철물쥐덫이 가격이 저렴하고 영구적며 재활용이 가능하다. 종류가 3가지 정도 있다. 일단쥐덫, 이단쥐덫, 망쥐덫. 망쥐덫(사각모양)은 쥐를 생포할때 사용하며, 큰쥐, 보통쥐, 생쥐 잡을때 성능이 우수하다.
이단쥐덫은 쥐를 죽여서 잡을때 사용한다. 이단쥐덫은 큰쥐, 보통쥐, 생쥐를 잡을 때 사용한다. 일단쥐덫은 큰쥐, 보통쥐는 잘 잡히나 생쥐는 놓치는 경우가 있다. 쥐의 어느 부위가 쥐덫에 걸리는지에 따라서 짧게는 10분, 길게는 1시간 이상 정도 지나서 죽게 된다.
2)끈끈이 설치법
끈끈이는 쥐털이 끈끈이액에 달라 붙어서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는 원리를 이용한다. 끈이는 한번 잡으면 재활용은 하지 못하고 쓰레기통속으로 같이 버린다. 1회용이다.
작은 쥐는 쉽게 잡을수 있지만, 큰쥐는 끈끈이에 붙어도 떨어져서 도망가는 경우가 있다.끈끈이는 설치하고 바로 잡아야 잘 잡힌다. 몇일이 지나면 끈끈이액이 말라서 성능이 떨어진다.
3)쥐약
쥐약은 쥐가 먹으면 죽는다. 조금 많이 먹으면 바로 죽는다. 그러나 개와 고양이들이 먹어서 다른 동물까지 죽게 할수도 있다. 외국에서 쥐약사용은 금지다.
쥐약을 먹은 쥐는 주로 밝은 곳으로 나와서 죽는다. 간혹 어두운 구석에서 죽으면 시체는 찾을 수가 없다. 썩어 없어질 때까지 냄새가 난다는 단점이 있다.
쥐를 잘 잡으려면 쥐가 좋아하는 음식을 잘 알아야 한다.
쥐는 잡식성 동물이기 때문에 아무거나 다 잘 먹는다. 냄새가 잘나는 멸치, 삶은 고기가 좋으며, 햄, 소시지, 계란, 김, 새우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는 반찬류를 먹이로 쓰면 된다.
쥐를 잘 잡으려면 철물쥐덫, 쥐약, 끈끈이 중에 용도 및 상황에 따라서 적절한 수단을 잘 선택해야한다. 상황이 비슷하다면 가격도 저렴하고 영구적으로 사용할수 있는 철물쥐덫이 가장 좋다.
철물쥐덫이 효과없는 큰 쥐의 경우에는 쥐약이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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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9일 수요일
2011년 4월 21일 목요일
금산분리법이 폐지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금산분리법 폐지 합의했다는데...
일반 지주회사에 금융계열사 소유의 길을 터주는 공정거래법 개정안 처리문제가 시급한 현안문제로 떠올랐다.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은 4월 국회에서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기로 정부와 여야가 합의했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20일 오후 (개정안을) 통과시키기로 잠정 합의했다"며 "28, 29일 이전에 법안심사소위를 한번 더 열어 법안을 통과시키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합의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공정거래법 개정안 통과가 불가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박영선 의원도“공정거래법이 개정되면 특혜를 받게 될 기업이 분명히 있는데 그냥 국회가 통과시킬 수 없지 않으냐”며 “공정거래위원회가 대안을 마련하겠다고 해서 28일 또는 29일께 소위를 다시 열어 논의해 보자고 한 것이지 합의가 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2008년 입법예고된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국회 법사위에 계류돼 있는 상태. 이 법안은 일반지주회사로서 금융계열사를 소유하고 있던 에스케이그룹에 사실상 특혜를 주는 법안이어서 많은 논란을 빚어왔다. 에스케이는 이번 국회에서 법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6월 말까지 에스케이증권 보유 지분을 매각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이상은 4월 21일 한겨레뉴스 요약이다.
일반 지주회사에 금융계열사 소유의 길을 터주는 금산분리법이 폐지되면 어떤일이 벌어질까? 금산분리법이 폐지된다면 재벌공화국, 삼성공화국은 불보듯 뻔하다. 2009년에 그려진 아래 만화는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고자하는 금산분리완화법이 시행되면 벌어질 수 있는 사태에 대해 알기쉽게 설명하고 있다.
2011.04.21.
일반 지주회사에 금융계열사 소유의 길을 터주는 공정거래법 개정안 처리문제가 시급한 현안문제로 떠올랐다.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은 4월 국회에서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기로 정부와 여야가 합의했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20일 오후 (개정안을) 통과시키기로 잠정 합의했다"며 "28, 29일 이전에 법안심사소위를 한번 더 열어 법안을 통과시키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합의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공정거래법 개정안 통과가 불가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박영선 의원도“공정거래법이 개정되면 특혜를 받게 될 기업이 분명히 있는데 그냥 국회가 통과시킬 수 없지 않으냐”며 “공정거래위원회가 대안을 마련하겠다고 해서 28일 또는 29일께 소위를 다시 열어 논의해 보자고 한 것이지 합의가 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2008년 입법예고된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국회 법사위에 계류돼 있는 상태. 이 법안은 일반지주회사로서 금융계열사를 소유하고 있던 에스케이그룹에 사실상 특혜를 주는 법안이어서 많은 논란을 빚어왔다. 에스케이는 이번 국회에서 법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6월 말까지 에스케이증권 보유 지분을 매각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이상은 4월 21일 한겨레뉴스 요약이다.
일반 지주회사에 금융계열사 소유의 길을 터주는 금산분리법이 폐지되면 어떤일이 벌어질까? 금산분리법이 폐지된다면 재벌공화국, 삼성공화국은 불보듯 뻔하다. 2009년에 그려진 아래 만화는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고자하는 금산분리완화법이 시행되면 벌어질 수 있는 사태에 대해 알기쉽게 설명하고 있다.
2011.04.21.
2011년 4월 8일 금요일
한완상 전 총재의 '수난절 편지'
한완상 교수의 기도
사회과학자, 행동하는 양심, 자원봉사자의 귀감 등으로 별칭 되는 한완상 대한적십자사 전(前) 총재. 그가 지난 2008년 자신의 설교들을 한데 모아 내놓은 <예수 없는 예수교회>에는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역사적 예수(실물 예수)'의 체취와 숨결과 비전이 들어 있습니다. 제가 아끼는 도서 목록 1호로 분류해 놓고 반복해서 읽는 이유이지요. 오늘도 실물 예수님이 몹시 생각나서 책꽂이에서 꺼내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본문을 읽느라 미처 읽지 못한 긴 편지 '참회하는 마음으로 쓴 수난절 편지' 한 장을 발견했습니다. 부활주일을 앞두고 여러 모로 분주할, 한국교회, 특히 대형 교회 담임목사들이 조용한 시간을 내어 꼭 일독했으면 좋겠다 싶어 이렇게 소개해 봅니다. -필자 주(뉴스앤조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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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평화의 예수님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절기를 앞두고, 1세기 닫힌 유대 사회에서 역사적 인물로서 당신이 친히 겪으셨던 외로움과 괴로움, 억울하고 부당했던 고통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과연 저 같은 인간이 거의 2,000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주님의 그 아픔에 역지사지할 수 있는지 자문하며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주님보다 거의 두 배나 긴 시간을 살았지만,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삶이었기에 주님의 발자취를 거울삼아 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싶습니다.
비록 2,000년 전에 주님이 겪으셨던 고통이었으나, 지금 저는 제 자신이 그때의 가해자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만일 제가 1세기 유대에 살았다면 주님을 율법주의 잣대로 비판하고 심판하려 했던 당시의 지식인과 종교 지도자의 반열에 섰을 가능성이 크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주님에게 손가락질과 삿대질을 해 대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서 제 모습을 보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역사적 알리바이는 뚜렷하더라도 저는 주님의 억울한 수난에 무관하다 말하기 어렵다고 느낍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뒤 초대교회는 로마의 잔혹한 학정 밑에서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실존적 체험과 그 체험에서 나온 새 희망과 믿음을 꿋꿋이 지켜 냈습니다.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기에, 저는 오늘도 예수따르미답게 제대로 못 사는 자신을 나무라며 부활의 주님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처럼 살기에는 21세기 제 삶이 너무 풍요롭고 너무 안정되어 도무지 주님처럼 자기 비움을 이룰 수 없음도 솔직히 고백합니다.
그런데 초대교회가 세속적 인정을 받아 힘과 부를 취하게 되자, 예수 운동은 점차 약해지고 역사적 예수의 놀라운 말씀과 행적은 교리의 높은 담벼락에 가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케리그마는 교리로 포장되었고, 주님의 감동적인 역사적 삶은 희미해진 듯합니다. 특히 초대교회가 역사적 예수를 기독교화하는 과정에서 주님이 실제로 겪었던 그 역사적 아픔은 신학적으로 추상화되고 만 듯합니다.
그뿐입니까? 주님의 수난, 죽음, 부활에 대한 교리적 담론이 변증론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게 되면서 점점 교회는 독선과 교만과 비관용의 제도로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힘 있는 중심 제도로 뿌리내린 교회는 주님의 이름으로 끔찍스러운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라는 제도와 교회라는 공적 기관이 교리로 고착된 하나의 그리스도상(像)에 어긋나는 모든 예수 담론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신화의 옷을 입은 교리의 그리스도는 갈릴리 예수로부터 아주 떨어져 나가고 말았습니다. 주님의 몸이라고 주장해 온 교회가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을 심각하게 분열시키고 괴롭혔다는 역설을 알기에 저는 단순히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것을 너무나 부끄럽게 생각하기에 이렇게 주님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갈릴리의 예수님, 사랑하고 존경하는 역사의 예수님
따지고 보면 주님의 말씀 하나하나, 주님의 행적 하나하나가 주님을 위험한 인물로 낙인찍었던 당시 종교 지도층으로 하여금 주님에게 의심과 차별, 억압과 비난을 쏟아붓게 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삶의 방식 자체가 기득권층에게는 위험하고 혐오스러운 떠돌이 삶으로 인식되었지요. 주님은 자기 주소로 된 집 한 채 제대로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주님은 길바닥의 존재로 사셨습니다. 하늘을 이불 삼고 땅바닥을 요로 삼아 살았습니다. 정말 처절하게 외로운 떠돌이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탄식하셨겠지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고 말이지요. 주님의 삶은 여우와 새보다 더 외로운 떠돌이 삶이었습니다. 주님의 삶에 견주어 우리의 삶은 너무나 여유로워 도무지 주님의 그 고독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주님은 고향 사람들에게도 배척을 받았습니다. 이른바 지역감정을 철저히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고향 나사렛에 있는 회당에서 첫 메시지(취임사)를 선포하신 뒤, 하필이면 반유대적인 발언을 하시어 유대 선민의식과 자존심을 심각하게 훼손시켰습니다. 하마터면 동네 사람들에게 떠밀려 낭떠러지에 추락사당할 뻔하지 않았습니까? 지역감정을 들먹여 정치적 자리 하나 얻으려는 우리네 추한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주님의 고결한 자세를 새삼 우러러 보게 됩니다. 고향 사람에게 왕따당하셨던 주님의 아픔을 지연과 혈연을 소중히 여기는 한국 크리스천들이 제대로 이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부끄럽습니다.
게다가 주님을 따른다는 제자들, 대체로 무식했던 열두 제자들의 한심한 정신 자세는 어땠습니까? 그들이 주님을 따르기로 결단했을 때부터 그 동기는 퍽 세속적이었던 듯합니다. 예수님이 집권하여 왕이 되면 한자리라도 얻어 걸칠 것을 계산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또 그들은 도무지 주님의 말씀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쉬운 비유의 말씀도 알아듣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짧은 경구의 뜻도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주님을 따르는 열둘 중에는 주님을 반대 세력에 팔아넘긴 가롯 유다가 있는가 하면, 목숨을 내놓고 끝까지 따르겠다고 핏대를 올리며 충성 맹세를 했다가 종내 비겁하기 짝이 없는 짓을 하고 만 베드로가 있지 않았습니까? 저는 최후 만찬에서 가롯 유다를 쳐다보시는 주님의 외로운 눈빛을 가끔 생각합니다. 저 같으면 유다의 뺨이라도 시원하게 갈겨주면서 '이놈, 정신 차려!' 하고 야단쳤을 텐데, 주님은 유다의 흑심을 꿰뚫어 보면서도 사랑과 연민이 교차하는 눈빛으로 그를 그윽하게 쳐다보시면서 오히려 한없이 안타까워하셨겠지요.
가롯 유다는 로마제국을 꺾고 민족국가를 세우려 했던 열혈 민족주의자들의 결사체 요원이었기에 예수님의 로마 대응 방식에 실망했을 테지요. 그가 과격한 민족 투쟁 의지 때문에 주님을 배신했다면, 저 역시 그같은 상황에서 제2의 가롯 유다가 절대로 안 될 것이라 장담할 수 있을까요? 주님은 가롯 유다의 뜨거운 민족애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기에 그를 더욱 연민의 눈빛으로 바라보신 것이 아닌지요? 게다가 그 배반 행위로 그가 겪을 엄청난 정신적, 역사적 저주와 고통을 미리 아시고, 그것을 더욱 안쓰러워하셨던 게 아닌가요? 주님의 마음을 이제는 얼마간 이해할 듯합니다.
너무나 인간적이기에 인격적인 예수님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겪었을 그 외로움과 괴로움을 이 수난절에 새삼 되새겨 봅니다. 주님의 입장에 서 보고 싶습니다. 사실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 아니 하나님과 같은 전지전능하신 분으로만 믿는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의 모습은 조금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감동적인 사건도 될 수 없겠지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죽음을 초월하시는 분인데, 무엇 때문에 수난을 앞두고서 불안해하거나 떨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로만 주님을 우러러 본다면, 겟세마네는 견디기 어려운 고뇌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인간적 외로움과 괴로움을 설명해 주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예수 잘 믿는' 신자가 되어 주님을 일방적으로 신격화하여 주님의 외로움과 괴로움을 신학적으로 추상화시킨 잘못이 부끄럽습니다. 주님은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솔직히 표현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따로 떨어져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는 너무나 처절했습니다. 얼굴에서 피와 땀이 흘러내릴 만큼 결사적이었습니다. 주님의 그 모습, 우리처럼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똑똑히 보게 됩니다. 또 봐야 합니다. 나아가 그 아픔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문득 1978년 2월 말 유신 체제 하에서 함석헌 선생이 동지들과 함께 작성한 3․1절 성명을 읽다가 연행된 사건이 떠오릅니다. 함 선생께서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저는 이제 내 차례구나 여기며, 그날 밤 한순간도 자지 못해 불안에 떨다가 주일 아침 일찍 교회에 가서 홀로 기도했습니다. 체포되기 직전의 순간으로 생각했기에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과 어느 정도 역지사지(易地思之)할 수 있었습니다. 피와 땀을 흘리지는 못했지만, 잔뜩 겁을 먹고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기에 주님께 힘과 용기를 달라고 매달렸습니다. 물론 주님의 그 괴로움과는 견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의 작은 사건으로 저는 겟세마네에서 주님이 보여 주신 실존적 몸부림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아픔은 단지 로마 당국에 체포되어 십자가형에 처해지리라는 예감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 중에서도 쓸 만하다고 여긴 핵심적인 세 사람,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가신 것은 주님의 아픔을 그들과 함께 나눠 갖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선택된 세 제자는 스승의 아픔을 외면하는 데도 역시 출중했습니다. 스승은 피땀 흘려 하나님께 매달리고 있는데, 그들은 잠을 이기지 못해 연신 고개를 떨구고 있었습니다. 긴장이 되었다면, 인간적 고뇌가 깊었다면, 스승의 아픔을 체휼했다면, 어찌 그렇게 잠이 쏟아졌겠습니까? 정말 한심한 제자들 아닙니까? 이런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신 주님도 정말 딱하다고 생각됩니다.
문제는 주님의 기도에 있습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지난 세월 크리스천과 제도 교회와 기독교는 그리스도에 관한 신조만 주목하고 강조했습니다. 주님의 경건한 종교적 믿음만을 강조하면서, 역시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며 주님을 우러러 왔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실존적 고뇌와 진솔한 인간적 고백을 외면해 왔습니다.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아픔은 바로 우리의 아픔과 같은 것으로 이 표현에 농축되어 있지 않습니까? 우리 보통 사람들의 아픔과 같기에 주님의 솔직한 이 기도가 더욱 뜨겁게 연약한 우리 인간의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린아이가 위험에 직면하여 아빠, 엄마를 찾는 심정으로 아바(Abba) 하나님을 외치신 주님의 너무나 인간적인 호소에 주님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
주님은 십자가의 엄청난 고통, 육체적․정신적․종교적․사회적 저주와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습니까? 주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웃으며 죽음의 잔을 들어 마시는 거룩하고 간 큰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우리처럼 죽음의 위협 앞에 극도로 초조해하며 불안해하는 그런 인간적인 분이었습니다. 그 고통은 너무나 진솔한 인간의 아픔이요, 인간적인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두려움이 컸으면 땀과 피가 비 오듯 얼굴을 적셨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아픔을 연기자의 거짓 아픔처럼, 절대 전능하신 분의 하찮은 감정처럼 간단히 처리해 왔음을 고백합니다. 적어도 수난절에나마 역사적 예수가 온몸으로 가슴 저리게 느꼈던 죽음의 공포와 불안을 우리의 것으로 체휼(體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음이 부끄럽습니다. 특히 주님의 실존적 아픔을 기독교 교리 입장에서 왜소화하고 탈각시켜 버린 잘못을 회개합니다.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외치셨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절규를 신학화하여 인간적 아픔의 극치를 둔화시킨 저희들의 안일한 신앙 행태를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이미 구약에서 예정된 계획에 따라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기계적으로 연기한 것처럼 받아들임으로써, 주님의 아픔을 신앙의 이름으로 너무나 가볍게 다루었습니다. 사실 예수의 절규를 연약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부르짖게 되는 원망과 절망의 외침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를 우리와 같은 분, 비겁한 우리들의 참된 벗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도 보통 사람의 아들처럼 애절한 절규를 내뱉을 수 있음을 보여 줌으로써, 보통 사람들에게 더 큰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랑과 평화의 그리스도 예수님
이제 저는 역사적 예수를 교리의 옷을 입혀 박제해 버린 우리 기독교 신자들의 잘못을 회개하고자 합니다. 역사적 예수는 유대 율법주의자들과 로마제국에 의해 고난당하셨을 뿐 아니라, 신앙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제국의 국교로 변질된 기독교에 의해서도 심각하게 괴롭힘을 당하셨습니다. 교회가 길고 긴 시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저지른 반인륜 범죄를 어떻게 일일이 열거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행된 끔찍한 범죄가 생겨날 때마다, 주님의 아픔은 2,000년 전 골고다의 십자가 위에서 겪으신 아픔보다 더 컸을 것입니다. 정말 그리스도 예수께 어떻게 사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타계한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가톨릭교회의 엄청난 잘못에 대해 개괄적으로 회개한 적이 있습니다. 비록 추상적이고 개괄적인 참회라며 일부 유대인이나 타 종교인들이 비판했지만, 그간 교황의 무오설을 믿어 왔던 가톨릭교회가 교황의 입을 통해 그같은 회개를 토해 내는 모습에 저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간 기독교(넓은 뜻에서 신․구교 모두)는 진리와 교리의 이름으로 타 종교에게 박해를 가했고, 선교의 이름으로 토착민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했으며, 기독교의 틀 안에서도 이른바 정통 교리에 위배되는 신앙 행위를 가혹하게 처단했으며, 종교재판을 통해 많은 신자들을 박해했고, 마녀사냥으로 특정 여성의 신앙 행위를 무자비하게 고문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죄악을 더 구체적으로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히틀러와 스탈린이 수백만 명을 숙청하고 살육하는 동안 그 끔찍한 범죄를 구경만 했던 경건한 기독교인과 교회도 그 무관심에 대해 뼈아픈 회개를 해야 합니다. 바로 그같은 교회의 비관용과 무관심, 노골적인 고문 행위야말로 바로 역사의 예수와 부활의 그리스도를 모두 따돌리고 고문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역설적이게도 크리스천들은 제도 교회의 교리적 틀 안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그리스도 예수를 괴롭혀 온 셈입니다. 왜 이런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을까요?
예수의 처형을 목격하면서 비겁하게 달아났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뒤, 담대한 죽음의 증인으로 변화된 것은 분명히 기독교를 탄생시킨 놀라운 은총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가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케리그마 복음이 역사적 예수의 감동적인 삶(말씀과 행위)에 무관심하거나 그것을 무시하면서 문제는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부활 이후의 예수를 그리스도로 격상시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희미해지거나 실종되고, 그리스도 담론만이 단단한 교리의 옷을 입은 변증적 신학 체계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교리는 차별과 비관용의 기준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리스도 담론, 즉 기독론은 이단을 경계하면서도 역설적으로 그것을 양산했고, 교회와 교인을 끊임없이 분열시켰으며, 그 분열에 따라 이른바 힘을 지닌 주류는 비주류를 줄기차게 차별하고 박멸하려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종교재판, 마녀사냥, 십자군 전쟁의 참화와 죄악이 나타났고, 마침내 해외 선교의 이름 아래 기독교 제국주의 정책이 토착민을 참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모든 것이 신성한 이름, 곧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저질러지고 정당화되었습니다. 너무나 끔찍한 고통을 주님에게 덮어씌우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참으로 한심한 것은 아직도 기독교와 교인들이 이 잘못을 제대로 깨닫지도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국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했다는 한국 개신교회는 부끄럽게도 교회 분열을 통해 가속적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마땅히 하나가 되어야 할 예수님의 몸은 교파 교리와 교파 내 복잡한 이해관계로 여러 갈래로 찢기고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예수파와 그리스도파가 싸우기도 했습니다. 예수교 장로교단과 기독교 장로교단의 싸움, 예수교 성결교단과 기독교 성결교단의 싸움이 그러합니다. 장로교단도 한국에서만 100개 이상으로 분열되었습니다. 이런 교파주의는 당신의 몸에 무수한 분열의 창칼을 들이대는 것과 같습니다. 얼마나 아프셨습니까? 주님, 저희를 용서하소서. 이제 부활절을 앞두고 주님의 고난이 지닌 참뜻을 깊이 깨닫고, 우리가 주님을 더욱 아프게 한 장본인임을 고백하게 하소서.
갈릴리 예수님, 생명과 부활의 그리스도여!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따르고자 합니다. 예수따르미가 되고자 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담백한 삶, 비움의 삶, 체휼의 삶을 닮기에는 21세기 자본주의 정보화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가 너무나 부유하고, 너무나 복잡하고, 너무나 탐욕스러움을 고백합니다. 그래도 갈릴리 예수를 닮는 길만이 인류가 구원받는 진리의 길임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 길에 당당히 나서도록 우리에게 소망과 비전, 용기와 능력을 허락하소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그 힘과 비전을 내려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역사적 예수를 따르는 데는 부활의 그리스도 능력이 절대로 필요함을 고백합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을 허락하소서.
우리 자신이야말로 21세기의 바리새인, 서기관, 대제사장, 로마 당국과 같은 존재임을 참회하게 하소서. 1세기 유대 땅에서 역사적 예수를 괴롭혔던 이들처럼, 21세기 정보화 세계에서도 크리스천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님을 괴롭히고 있음을 회개하게 하소서. 이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지금 여기서 예수의 삶을 살 수 있게 하소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리면서까지 죽음의 고통을 피하고자 몸부림치셨던 주님의 모습에서 우리 연약한 인간들이 새삼 용기를 얻고, 주님의 그 아픔을 오늘 여기서 체휼하게 하소서. 오늘 이곳이 겟세마네 동산이 되어 "이 잔을 피하게 해 주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 뜻이 이뤄지게 하소서"라고 하나님께 피땀으로 외치셨던 인간 예수를 뜨겁게 만나는 은총의 자리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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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자, 행동하는 양심, 자원봉사자의 귀감 등으로 별칭 되는 한완상 대한적십자사 전(前) 총재. 그가 지난 2008년 자신의 설교들을 한데 모아 내놓은 <예수 없는 예수교회>에는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역사적 예수(실물 예수)'의 체취와 숨결과 비전이 들어 있습니다. 제가 아끼는 도서 목록 1호로 분류해 놓고 반복해서 읽는 이유이지요. 오늘도 실물 예수님이 몹시 생각나서 책꽂이에서 꺼내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본문을 읽느라 미처 읽지 못한 긴 편지 '참회하는 마음으로 쓴 수난절 편지' 한 장을 발견했습니다. 부활주일을 앞두고 여러 모로 분주할, 한국교회, 특히 대형 교회 담임목사들이 조용한 시간을 내어 꼭 일독했으면 좋겠다 싶어 이렇게 소개해 봅니다. -필자 주(뉴스앤조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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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평화의 예수님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절기를 앞두고, 1세기 닫힌 유대 사회에서 역사적 인물로서 당신이 친히 겪으셨던 외로움과 괴로움, 억울하고 부당했던 고통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과연 저 같은 인간이 거의 2,000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주님의 그 아픔에 역지사지할 수 있는지 자문하며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주님보다 거의 두 배나 긴 시간을 살았지만,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삶이었기에 주님의 발자취를 거울삼아 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싶습니다.
비록 2,000년 전에 주님이 겪으셨던 고통이었으나, 지금 저는 제 자신이 그때의 가해자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만일 제가 1세기 유대에 살았다면 주님을 율법주의 잣대로 비판하고 심판하려 했던 당시의 지식인과 종교 지도자의 반열에 섰을 가능성이 크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주님에게 손가락질과 삿대질을 해 대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서 제 모습을 보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역사적 알리바이는 뚜렷하더라도 저는 주님의 억울한 수난에 무관하다 말하기 어렵다고 느낍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뒤 초대교회는 로마의 잔혹한 학정 밑에서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실존적 체험과 그 체험에서 나온 새 희망과 믿음을 꿋꿋이 지켜 냈습니다.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기에, 저는 오늘도 예수따르미답게 제대로 못 사는 자신을 나무라며 부활의 주님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처럼 살기에는 21세기 제 삶이 너무 풍요롭고 너무 안정되어 도무지 주님처럼 자기 비움을 이룰 수 없음도 솔직히 고백합니다.
그런데 초대교회가 세속적 인정을 받아 힘과 부를 취하게 되자, 예수 운동은 점차 약해지고 역사적 예수의 놀라운 말씀과 행적은 교리의 높은 담벼락에 가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케리그마는 교리로 포장되었고, 주님의 감동적인 역사적 삶은 희미해진 듯합니다. 특히 초대교회가 역사적 예수를 기독교화하는 과정에서 주님이 실제로 겪었던 그 역사적 아픔은 신학적으로 추상화되고 만 듯합니다.
그뿐입니까? 주님의 수난, 죽음, 부활에 대한 교리적 담론이 변증론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게 되면서 점점 교회는 독선과 교만과 비관용의 제도로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힘 있는 중심 제도로 뿌리내린 교회는 주님의 이름으로 끔찍스러운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라는 제도와 교회라는 공적 기관이 교리로 고착된 하나의 그리스도상(像)에 어긋나는 모든 예수 담론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신화의 옷을 입은 교리의 그리스도는 갈릴리 예수로부터 아주 떨어져 나가고 말았습니다. 주님의 몸이라고 주장해 온 교회가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을 심각하게 분열시키고 괴롭혔다는 역설을 알기에 저는 단순히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것을 너무나 부끄럽게 생각하기에 이렇게 주님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갈릴리의 예수님, 사랑하고 존경하는 역사의 예수님
따지고 보면 주님의 말씀 하나하나, 주님의 행적 하나하나가 주님을 위험한 인물로 낙인찍었던 당시 종교 지도층으로 하여금 주님에게 의심과 차별, 억압과 비난을 쏟아붓게 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삶의 방식 자체가 기득권층에게는 위험하고 혐오스러운 떠돌이 삶으로 인식되었지요. 주님은 자기 주소로 된 집 한 채 제대로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주님은 길바닥의 존재로 사셨습니다. 하늘을 이불 삼고 땅바닥을 요로 삼아 살았습니다. 정말 처절하게 외로운 떠돌이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탄식하셨겠지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고 말이지요. 주님의 삶은 여우와 새보다 더 외로운 떠돌이 삶이었습니다. 주님의 삶에 견주어 우리의 삶은 너무나 여유로워 도무지 주님의 그 고독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주님은 고향 사람들에게도 배척을 받았습니다. 이른바 지역감정을 철저히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고향 나사렛에 있는 회당에서 첫 메시지(취임사)를 선포하신 뒤, 하필이면 반유대적인 발언을 하시어 유대 선민의식과 자존심을 심각하게 훼손시켰습니다. 하마터면 동네 사람들에게 떠밀려 낭떠러지에 추락사당할 뻔하지 않았습니까? 지역감정을 들먹여 정치적 자리 하나 얻으려는 우리네 추한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주님의 고결한 자세를 새삼 우러러 보게 됩니다. 고향 사람에게 왕따당하셨던 주님의 아픔을 지연과 혈연을 소중히 여기는 한국 크리스천들이 제대로 이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부끄럽습니다.
게다가 주님을 따른다는 제자들, 대체로 무식했던 열두 제자들의 한심한 정신 자세는 어땠습니까? 그들이 주님을 따르기로 결단했을 때부터 그 동기는 퍽 세속적이었던 듯합니다. 예수님이 집권하여 왕이 되면 한자리라도 얻어 걸칠 것을 계산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또 그들은 도무지 주님의 말씀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쉬운 비유의 말씀도 알아듣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짧은 경구의 뜻도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주님을 따르는 열둘 중에는 주님을 반대 세력에 팔아넘긴 가롯 유다가 있는가 하면, 목숨을 내놓고 끝까지 따르겠다고 핏대를 올리며 충성 맹세를 했다가 종내 비겁하기 짝이 없는 짓을 하고 만 베드로가 있지 않았습니까? 저는 최후 만찬에서 가롯 유다를 쳐다보시는 주님의 외로운 눈빛을 가끔 생각합니다. 저 같으면 유다의 뺨이라도 시원하게 갈겨주면서 '이놈, 정신 차려!' 하고 야단쳤을 텐데, 주님은 유다의 흑심을 꿰뚫어 보면서도 사랑과 연민이 교차하는 눈빛으로 그를 그윽하게 쳐다보시면서 오히려 한없이 안타까워하셨겠지요.
가롯 유다는 로마제국을 꺾고 민족국가를 세우려 했던 열혈 민족주의자들의 결사체 요원이었기에 예수님의 로마 대응 방식에 실망했을 테지요. 그가 과격한 민족 투쟁 의지 때문에 주님을 배신했다면, 저 역시 그같은 상황에서 제2의 가롯 유다가 절대로 안 될 것이라 장담할 수 있을까요? 주님은 가롯 유다의 뜨거운 민족애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기에 그를 더욱 연민의 눈빛으로 바라보신 것이 아닌지요? 게다가 그 배반 행위로 그가 겪을 엄청난 정신적, 역사적 저주와 고통을 미리 아시고, 그것을 더욱 안쓰러워하셨던 게 아닌가요? 주님의 마음을 이제는 얼마간 이해할 듯합니다.
너무나 인간적이기에 인격적인 예수님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겪었을 그 외로움과 괴로움을 이 수난절에 새삼 되새겨 봅니다. 주님의 입장에 서 보고 싶습니다. 사실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 아니 하나님과 같은 전지전능하신 분으로만 믿는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의 모습은 조금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감동적인 사건도 될 수 없겠지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죽음을 초월하시는 분인데, 무엇 때문에 수난을 앞두고서 불안해하거나 떨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로만 주님을 우러러 본다면, 겟세마네는 견디기 어려운 고뇌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인간적 외로움과 괴로움을 설명해 주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예수 잘 믿는' 신자가 되어 주님을 일방적으로 신격화하여 주님의 외로움과 괴로움을 신학적으로 추상화시킨 잘못이 부끄럽습니다. 주님은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솔직히 표현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따로 떨어져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는 너무나 처절했습니다. 얼굴에서 피와 땀이 흘러내릴 만큼 결사적이었습니다. 주님의 그 모습, 우리처럼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똑똑히 보게 됩니다. 또 봐야 합니다. 나아가 그 아픔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문득 1978년 2월 말 유신 체제 하에서 함석헌 선생이 동지들과 함께 작성한 3․1절 성명을 읽다가 연행된 사건이 떠오릅니다. 함 선생께서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저는 이제 내 차례구나 여기며, 그날 밤 한순간도 자지 못해 불안에 떨다가 주일 아침 일찍 교회에 가서 홀로 기도했습니다. 체포되기 직전의 순간으로 생각했기에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과 어느 정도 역지사지(易地思之)할 수 있었습니다. 피와 땀을 흘리지는 못했지만, 잔뜩 겁을 먹고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기에 주님께 힘과 용기를 달라고 매달렸습니다. 물론 주님의 그 괴로움과는 견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의 작은 사건으로 저는 겟세마네에서 주님이 보여 주신 실존적 몸부림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아픔은 단지 로마 당국에 체포되어 십자가형에 처해지리라는 예감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 중에서도 쓸 만하다고 여긴 핵심적인 세 사람,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가신 것은 주님의 아픔을 그들과 함께 나눠 갖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선택된 세 제자는 스승의 아픔을 외면하는 데도 역시 출중했습니다. 스승은 피땀 흘려 하나님께 매달리고 있는데, 그들은 잠을 이기지 못해 연신 고개를 떨구고 있었습니다. 긴장이 되었다면, 인간적 고뇌가 깊었다면, 스승의 아픔을 체휼했다면, 어찌 그렇게 잠이 쏟아졌겠습니까? 정말 한심한 제자들 아닙니까? 이런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신 주님도 정말 딱하다고 생각됩니다.
문제는 주님의 기도에 있습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지난 세월 크리스천과 제도 교회와 기독교는 그리스도에 관한 신조만 주목하고 강조했습니다. 주님의 경건한 종교적 믿음만을 강조하면서, 역시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며 주님을 우러러 왔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실존적 고뇌와 진솔한 인간적 고백을 외면해 왔습니다.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아픔은 바로 우리의 아픔과 같은 것으로 이 표현에 농축되어 있지 않습니까? 우리 보통 사람들의 아픔과 같기에 주님의 솔직한 이 기도가 더욱 뜨겁게 연약한 우리 인간의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린아이가 위험에 직면하여 아빠, 엄마를 찾는 심정으로 아바(Abba) 하나님을 외치신 주님의 너무나 인간적인 호소에 주님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
주님은 십자가의 엄청난 고통, 육체적․정신적․종교적․사회적 저주와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습니까? 주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웃으며 죽음의 잔을 들어 마시는 거룩하고 간 큰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우리처럼 죽음의 위협 앞에 극도로 초조해하며 불안해하는 그런 인간적인 분이었습니다. 그 고통은 너무나 진솔한 인간의 아픔이요, 인간적인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두려움이 컸으면 땀과 피가 비 오듯 얼굴을 적셨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아픔을 연기자의 거짓 아픔처럼, 절대 전능하신 분의 하찮은 감정처럼 간단히 처리해 왔음을 고백합니다. 적어도 수난절에나마 역사적 예수가 온몸으로 가슴 저리게 느꼈던 죽음의 공포와 불안을 우리의 것으로 체휼(體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음이 부끄럽습니다. 특히 주님의 실존적 아픔을 기독교 교리 입장에서 왜소화하고 탈각시켜 버린 잘못을 회개합니다.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외치셨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절규를 신학화하여 인간적 아픔의 극치를 둔화시킨 저희들의 안일한 신앙 행태를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이미 구약에서 예정된 계획에 따라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기계적으로 연기한 것처럼 받아들임으로써, 주님의 아픔을 신앙의 이름으로 너무나 가볍게 다루었습니다. 사실 예수의 절규를 연약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부르짖게 되는 원망과 절망의 외침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를 우리와 같은 분, 비겁한 우리들의 참된 벗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도 보통 사람의 아들처럼 애절한 절규를 내뱉을 수 있음을 보여 줌으로써, 보통 사람들에게 더 큰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랑과 평화의 그리스도 예수님
이제 저는 역사적 예수를 교리의 옷을 입혀 박제해 버린 우리 기독교 신자들의 잘못을 회개하고자 합니다. 역사적 예수는 유대 율법주의자들과 로마제국에 의해 고난당하셨을 뿐 아니라, 신앙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제국의 국교로 변질된 기독교에 의해서도 심각하게 괴롭힘을 당하셨습니다. 교회가 길고 긴 시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저지른 반인륜 범죄를 어떻게 일일이 열거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행된 끔찍한 범죄가 생겨날 때마다, 주님의 아픔은 2,000년 전 골고다의 십자가 위에서 겪으신 아픔보다 더 컸을 것입니다. 정말 그리스도 예수께 어떻게 사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타계한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가톨릭교회의 엄청난 잘못에 대해 개괄적으로 회개한 적이 있습니다. 비록 추상적이고 개괄적인 참회라며 일부 유대인이나 타 종교인들이 비판했지만, 그간 교황의 무오설을 믿어 왔던 가톨릭교회가 교황의 입을 통해 그같은 회개를 토해 내는 모습에 저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간 기독교(넓은 뜻에서 신․구교 모두)는 진리와 교리의 이름으로 타 종교에게 박해를 가했고, 선교의 이름으로 토착민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했으며, 기독교의 틀 안에서도 이른바 정통 교리에 위배되는 신앙 행위를 가혹하게 처단했으며, 종교재판을 통해 많은 신자들을 박해했고, 마녀사냥으로 특정 여성의 신앙 행위를 무자비하게 고문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죄악을 더 구체적으로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히틀러와 스탈린이 수백만 명을 숙청하고 살육하는 동안 그 끔찍한 범죄를 구경만 했던 경건한 기독교인과 교회도 그 무관심에 대해 뼈아픈 회개를 해야 합니다. 바로 그같은 교회의 비관용과 무관심, 노골적인 고문 행위야말로 바로 역사의 예수와 부활의 그리스도를 모두 따돌리고 고문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역설적이게도 크리스천들은 제도 교회의 교리적 틀 안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그리스도 예수를 괴롭혀 온 셈입니다. 왜 이런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을까요?
예수의 처형을 목격하면서 비겁하게 달아났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뒤, 담대한 죽음의 증인으로 변화된 것은 분명히 기독교를 탄생시킨 놀라운 은총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가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케리그마 복음이 역사적 예수의 감동적인 삶(말씀과 행위)에 무관심하거나 그것을 무시하면서 문제는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부활 이후의 예수를 그리스도로 격상시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희미해지거나 실종되고, 그리스도 담론만이 단단한 교리의 옷을 입은 변증적 신학 체계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교리는 차별과 비관용의 기준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리스도 담론, 즉 기독론은 이단을 경계하면서도 역설적으로 그것을 양산했고, 교회와 교인을 끊임없이 분열시켰으며, 그 분열에 따라 이른바 힘을 지닌 주류는 비주류를 줄기차게 차별하고 박멸하려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종교재판, 마녀사냥, 십자군 전쟁의 참화와 죄악이 나타났고, 마침내 해외 선교의 이름 아래 기독교 제국주의 정책이 토착민을 참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모든 것이 신성한 이름, 곧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저질러지고 정당화되었습니다. 너무나 끔찍한 고통을 주님에게 덮어씌우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참으로 한심한 것은 아직도 기독교와 교인들이 이 잘못을 제대로 깨닫지도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국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했다는 한국 개신교회는 부끄럽게도 교회 분열을 통해 가속적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마땅히 하나가 되어야 할 예수님의 몸은 교파 교리와 교파 내 복잡한 이해관계로 여러 갈래로 찢기고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예수파와 그리스도파가 싸우기도 했습니다. 예수교 장로교단과 기독교 장로교단의 싸움, 예수교 성결교단과 기독교 성결교단의 싸움이 그러합니다. 장로교단도 한국에서만 100개 이상으로 분열되었습니다. 이런 교파주의는 당신의 몸에 무수한 분열의 창칼을 들이대는 것과 같습니다. 얼마나 아프셨습니까? 주님, 저희를 용서하소서. 이제 부활절을 앞두고 주님의 고난이 지닌 참뜻을 깊이 깨닫고, 우리가 주님을 더욱 아프게 한 장본인임을 고백하게 하소서.
갈릴리 예수님, 생명과 부활의 그리스도여!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따르고자 합니다. 예수따르미가 되고자 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담백한 삶, 비움의 삶, 체휼의 삶을 닮기에는 21세기 자본주의 정보화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가 너무나 부유하고, 너무나 복잡하고, 너무나 탐욕스러움을 고백합니다. 그래도 갈릴리 예수를 닮는 길만이 인류가 구원받는 진리의 길임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 길에 당당히 나서도록 우리에게 소망과 비전, 용기와 능력을 허락하소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그 힘과 비전을 내려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역사적 예수를 따르는 데는 부활의 그리스도 능력이 절대로 필요함을 고백합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을 허락하소서.
우리 자신이야말로 21세기의 바리새인, 서기관, 대제사장, 로마 당국과 같은 존재임을 참회하게 하소서. 1세기 유대 땅에서 역사적 예수를 괴롭혔던 이들처럼, 21세기 정보화 세계에서도 크리스천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님을 괴롭히고 있음을 회개하게 하소서. 이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지금 여기서 예수의 삶을 살 수 있게 하소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리면서까지 죽음의 고통을 피하고자 몸부림치셨던 주님의 모습에서 우리 연약한 인간들이 새삼 용기를 얻고, 주님의 그 아픔을 오늘 여기서 체휼하게 하소서. 오늘 이곳이 겟세마네 동산이 되어 "이 잔을 피하게 해 주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 뜻이 이뤄지게 하소서"라고 하나님께 피땀으로 외치셨던 인간 예수를 뜨겁게 만나는 은총의 자리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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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27일 일요일
보이지 않는 고릴라와 천안함
Selective Attention Test(1999)
위 실험은 1999년 하버드 심리학과에서 행해진 유명한 실험이다. 흰 옷 입은 학생 3명이 한팀이고 검은 옷 입은 3명이 다른 팀이다. 각 팀은 서로 같은 옷을 입은 사람에게 농구공을 패스하는데, 검은 옷 팀의 패스는 무시하고, 흰옷 팀 사람들의 농구공 패스 횟수가 몇 번인지 세면된다. 주어진 시간은 1분이고 주의력을 집중해서 센다.
패스횟수는 15회가 정답이다. 크리스토퍼 차브리스와 대니얼 사이먼스 두 심리학자는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위 동영상을 보여주면서 마지막에 질문한다. "고릴라를 보았습니까?" 놀랍게도 실험참가자 50%가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고 답한다.
이 실험은 일명 "보이지 않는 고릴라"라는 실험으로 대단한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다. 세계 곳곳에서 실험한 결과 50% 정도의 사람은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 고릴라와 검은 옷 사람들이 색깔이 비슷했서 착각할 수도 있겠다 싶어 다른 학자들이 빨간 고릴라를 출현시켰지만 30% 정도의 사람들이 여전히 고릴라를 전혀 보지 못했다.
위 실험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바라보는 것'과 '보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한 실험이었다. 우리가 무엇인가 바라본다고 해서 바라본 대상을 다 인식하는 것은 것은 아니다. 단지, 보이는 것만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우리 시선에 들어온 장면 모두를 우리 뇌는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 뇌는 시선에 들어온 정보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용량의 한계가 있단다.
두 심리학자는 이런 현상을 '무주의 맹시"라 불렀다. 흔히 사람들은 우리가 두 눈으로 직접 본 어떤 대상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인식할 수 있을 거라 착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두 눈으로 분명히 보았지만 전혀 보이지 않는 경우도 다반사로 일어난다.
쉬운 예로 핸드폰 통화를 하면서 시청에서 신촌까지 운전한 당신이 핸드폰 통화를 끝냈을 무렵 어떻게 운전해 왔지는 전혀 기억할 수 없는 것도 '보이지 않는 고릴라 현상'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쯤되면 우리가 확실하게 여기는 어떤 기억 속에도 "보이지 않은 고릴라"가 한 번 쯤은 지나갔을 수도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현상은 일상의 사소한 기억에서부터 사회적인 큰 사건에서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같은 범죄사건을 목격한 목격자들의 진술이 서로 엇갈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최근 출판된 [보이지 않는 고릴라]라는 책에는 아주 중요한 사회적 사건의 한 예를 들고 있다. 2001년 2월 9일 발생한 미국 핵잠수함과 일본 어선의 충동 사례가 그것이다.
"조지 부시의 임기 중 처음으로 발생했던 중요한 국제적 사건을 기억하는가? 사건은 대통령이 취임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던 무렵인 2001년 2월 9일에 발생했다. 오후 1시 40분쯤 하와이 근해에 있던 미해군 핵 잠수함 그린빌호의 함장 스코트 워들 사령관은 잠수함을 빠르게 잠수시키는 긴급기동 훈련인 '긴급 잠항'을 지시했다.
사령관은 이어 '메인 부력탱크 긴급부상'을 지시했다. 메인 부력탱크에 든 물을 고압의 공기로 밀어내어 최대한 빠른 속도로 잠수함을 수면 위로 올리는 작전이다. 영화<붉은 10월>에도 나오는 이런 군사 작전에서는 잠수함의 선수가 수면 위로 크게 튀어 오른다.
그런데 그린빌호가 수면으로 급상승하던 순간, 엄청난 굉음이 울리며 함정 전체가 흔들렸다. "맙소사!" 위들 사령관은 말했다. "도대체 위에 뭐가 있나?"
아주 빠른 속도로 수면위로 상승하던 그 잠수한 바로 위에 일본 선박 에히메마루(愛媛丸)가 있었던 것이다. 북극 지역에서 유빙을 뚫고 올라 갈 수 있도록 특별히 제작된 그린빌호의 수직타는 선박을 두 동강 내고 말았다. 연료가 새면서 배에 물이 차올랐고, 불과 몇 분 만에 어선은 기울여졌다.
무거운 선미 쪽이 먼저 가라앉자 배에 있던 사람들은 뱃머리쪽으로 앞 다퉈 달려갔다. 많은 사람들이 부명보트에 올라 구조되었지만 선원 세 명과 승객 여섯 명이 죽었다. 반면 그린빌호는 경미한 손상만 입었을뿐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뭐가 잘못이었을까? 최첨단 음파 탐지기를 갖추고 베테랑 승무원이 조정하는 현대식 잠수함이 어째서 그렇게 가까이 있는, 거의 60미터에 달하는 큰 선박을 발견하지 못한 걸까?"
위 사건은 흡사 미핵잠수함과의 추돌설에 등장하는 "천안암 사건"과 거의 유사하다. 미핵잠수함과 천안함 충돌설이 사실이라면, 미핵잠수함 함장의 잠만경엔 '고릴라'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그린빌호의 함장 스코트 워들 사령관은 부상하기전 잠만경으로 360도 관찰하였으나 일본어선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내용이 미국 교통안전위원회가 작성한 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사령관은 나중에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잠만경으로 관찰하면서 "배를 찾고 있지도 않았도, 배가 있을거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배를 찾고자 하지 않았기에 바로 근처에 있는 일본어선이라는 고릴라에 시선이 순간적으로 머물면서도 배를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천암함 사건과 관련해서 미핵잠수함과 천안함의 충동설이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미핵잠수함 내부로 들어가 무슨일이 벌어졌는지, 2001년 그린빌호의 예를 통해 시각을 바꾸어 천안함 사태를 분석해 보는 것도 의미있겠다.
충동설을 전제로, 당시 서해상의 미핵잠수함은 소나가 작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함장이 야간 투시 잠만경으로 360도 관찰 후에도 바로 근거리에 있는 천안함이라는 고릴라를 보지못했을 것이다.
"미핵잠수함 그린빌호가 급상승하는 순간, 엄청난 굉음이 울리며 함정전체가 흔들렸다. '맙고사!' 위들 사령관은 말했다. '도대체 위에 뭐가 있나?'"
뭐가 있긴 "보이지 않는 고릴라"가 있지.
고릴라가 보이지 않는 순간 사건은 발생하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일본 어선과 천안함은 "보이지 않는 고릴라"였는지도 모른다.
※ 이 글은 [보이지 않는 고릴라](김영사)에서 본문 인용함.
...
위 실험은 1999년 하버드 심리학과에서 행해진 유명한 실험이다. 흰 옷 입은 학생 3명이 한팀이고 검은 옷 입은 3명이 다른 팀이다. 각 팀은 서로 같은 옷을 입은 사람에게 농구공을 패스하는데, 검은 옷 팀의 패스는 무시하고, 흰옷 팀 사람들의 농구공 패스 횟수가 몇 번인지 세면된다. 주어진 시간은 1분이고 주의력을 집중해서 센다.
패스횟수는 15회가 정답이다. 크리스토퍼 차브리스와 대니얼 사이먼스 두 심리학자는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위 동영상을 보여주면서 마지막에 질문한다. "고릴라를 보았습니까?" 놀랍게도 실험참가자 50%가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고 답한다.
이 실험은 일명 "보이지 않는 고릴라"라는 실험으로 대단한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다. 세계 곳곳에서 실험한 결과 50% 정도의 사람은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 고릴라와 검은 옷 사람들이 색깔이 비슷했서 착각할 수도 있겠다 싶어 다른 학자들이 빨간 고릴라를 출현시켰지만 30% 정도의 사람들이 여전히 고릴라를 전혀 보지 못했다.
위 실험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바라보는 것'과 '보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한 실험이었다. 우리가 무엇인가 바라본다고 해서 바라본 대상을 다 인식하는 것은 것은 아니다. 단지, 보이는 것만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우리 시선에 들어온 장면 모두를 우리 뇌는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 뇌는 시선에 들어온 정보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용량의 한계가 있단다.
두 심리학자는 이런 현상을 '무주의 맹시"라 불렀다. 흔히 사람들은 우리가 두 눈으로 직접 본 어떤 대상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인식할 수 있을 거라 착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두 눈으로 분명히 보았지만 전혀 보이지 않는 경우도 다반사로 일어난다.
쉬운 예로 핸드폰 통화를 하면서 시청에서 신촌까지 운전한 당신이 핸드폰 통화를 끝냈을 무렵 어떻게 운전해 왔지는 전혀 기억할 수 없는 것도 '보이지 않는 고릴라 현상'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쯤되면 우리가 확실하게 여기는 어떤 기억 속에도 "보이지 않은 고릴라"가 한 번 쯤은 지나갔을 수도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현상은 일상의 사소한 기억에서부터 사회적인 큰 사건에서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같은 범죄사건을 목격한 목격자들의 진술이 서로 엇갈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최근 출판된 [보이지 않는 고릴라]라는 책에는 아주 중요한 사회적 사건의 한 예를 들고 있다. 2001년 2월 9일 발생한 미국 핵잠수함과 일본 어선의 충동 사례가 그것이다.
"조지 부시의 임기 중 처음으로 발생했던 중요한 국제적 사건을 기억하는가? 사건은 대통령이 취임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던 무렵인 2001년 2월 9일에 발생했다. 오후 1시 40분쯤 하와이 근해에 있던 미해군 핵 잠수함 그린빌호의 함장 스코트 워들 사령관은 잠수함을 빠르게 잠수시키는 긴급기동 훈련인 '긴급 잠항'을 지시했다.
사령관은 이어 '메인 부력탱크 긴급부상'을 지시했다. 메인 부력탱크에 든 물을 고압의 공기로 밀어내어 최대한 빠른 속도로 잠수함을 수면 위로 올리는 작전이다. 영화<붉은 10월>에도 나오는 이런 군사 작전에서는 잠수함의 선수가 수면 위로 크게 튀어 오른다.
그런데 그린빌호가 수면으로 급상승하던 순간, 엄청난 굉음이 울리며 함정 전체가 흔들렸다. "맙소사!" 위들 사령관은 말했다. "도대체 위에 뭐가 있나?"
아주 빠른 속도로 수면위로 상승하던 그 잠수한 바로 위에 일본 선박 에히메마루(愛媛丸)가 있었던 것이다. 북극 지역에서 유빙을 뚫고 올라 갈 수 있도록 특별히 제작된 그린빌호의 수직타는 선박을 두 동강 내고 말았다. 연료가 새면서 배에 물이 차올랐고, 불과 몇 분 만에 어선은 기울여졌다.
무거운 선미 쪽이 먼저 가라앉자 배에 있던 사람들은 뱃머리쪽으로 앞 다퉈 달려갔다. 많은 사람들이 부명보트에 올라 구조되었지만 선원 세 명과 승객 여섯 명이 죽었다. 반면 그린빌호는 경미한 손상만 입었을뿐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뭐가 잘못이었을까? 최첨단 음파 탐지기를 갖추고 베테랑 승무원이 조정하는 현대식 잠수함이 어째서 그렇게 가까이 있는, 거의 60미터에 달하는 큰 선박을 발견하지 못한 걸까?"
위 사건은 흡사 미핵잠수함과의 추돌설에 등장하는 "천안암 사건"과 거의 유사하다. 미핵잠수함과 천안함 충돌설이 사실이라면, 미핵잠수함 함장의 잠만경엔 '고릴라'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그린빌호의 함장 스코트 워들 사령관은 부상하기전 잠만경으로 360도 관찰하였으나 일본어선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내용이 미국 교통안전위원회가 작성한 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사령관은 나중에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잠만경으로 관찰하면서 "배를 찾고 있지도 않았도, 배가 있을거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배를 찾고자 하지 않았기에 바로 근처에 있는 일본어선이라는 고릴라에 시선이 순간적으로 머물면서도 배를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천암함 사건과 관련해서 미핵잠수함과 천안함의 충동설이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미핵잠수함 내부로 들어가 무슨일이 벌어졌는지, 2001년 그린빌호의 예를 통해 시각을 바꾸어 천안함 사태를 분석해 보는 것도 의미있겠다.
충동설을 전제로, 당시 서해상의 미핵잠수함은 소나가 작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함장이 야간 투시 잠만경으로 360도 관찰 후에도 바로 근거리에 있는 천안함이라는 고릴라를 보지못했을 것이다.
"미핵잠수함 그린빌호가 급상승하는 순간, 엄청난 굉음이 울리며 함정전체가 흔들렸다. '맙고사!' 위들 사령관은 말했다. '도대체 위에 뭐가 있나?'"
뭐가 있긴 "보이지 않는 고릴라"가 있지.
고릴라가 보이지 않는 순간 사건은 발생하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일본 어선과 천안함은 "보이지 않는 고릴라"였는지도 모른다.
※ 이 글은 [보이지 않는 고릴라](김영사)에서 본문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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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21일 월요일
종교적 체험과 자율신경계
편도체에 들어앉은 하나님
라캉은 의식과 무의식도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말한다. 생각, 사고, 잡념, 고민, 걱정, 불안 등도 대뇌피질 전두엽에서 직간접적 경험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전두엽에 구조화된 의식은 동물뇌, 정서뇌라 불리는 변연계(특히 편도체)에 영향을 주고 걱정, 불안, 안도, 평안함 등을 일으킨다.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생각은 일종의 강박증, 노이로제, 집착증인데, 프로이드는 종교를 '집단신경증'이라 했다.
기도, 명상, 수련, 참선 등은 이런 전두엽의 논리적, 언어적 사고를 중단하고 우리 의지와 독립된 자율신경계를 안정상태로 조절해서 평안에 이르는 게 하는 방법들이다. 자율신경계를 우리 의지대로 조정하는 방법은 '호흡법'밖에 없는데, 그래서 명상, 참선 등을 행할 때 자신의 호흡에만 집중하는 것이 그런 연유에서다.
과거에 슈가레이 레너드라는 복서가 있었는데 이 선수의 반사 신경이 얼마나 빠른지 보통사람의 2배 정도였다고 한다. 옛 무사들의 지독한 수련은 반사신경을 증진시키 위한 것이었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칼놀림. 대뇌에서 보고 판단하고 명령을 내리기 전에 척수에서 명령을 내려버린다. 이것은 척수반사다. 훈련에 따라 운동선수들의 반사신경은 보통사람보다 2배 정도 증진시킬 수 있다고 한다.
깨달음, 무념무상, 견성, 종교적 체험은 대뇌피질, 전두엽의 논리적, 언어적 사고를 끊고 스스로 뇌의 변연계가 관장하는 자율신경계를 컨트롤 할 수 있다는 것의 다른 말이다. 이런 조절능력은 훈련, 수련을 통해 충분히 가능하다.
어떤 종교적 깨달음이 반드시 좋은 것인지는 이론이 있을 수 있다. 깨달음의 댓가로 전두엽의 논리적, 언어적 사고를 중지한 것이기에 구체적 삶의 변화를 합리적으로 판단하기에는 훈련이 부족하고 현실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능력은 저하될 수밖에 없다.
현실문제와 연관된 전두엽의 추리능력을 포기했으므로 당면한 가족사나 정치 경제 사회 문제에 대한 판단능력이 떨어지므로 현실 괴리감이 발생할 수도 있다. 흔히 현실감각이 없다, 현실도피자, 이상주의자, '도튼 중' 같다는 말을 듣곤 한다. 득도, 영성, 구원을 받을 것인지, 범부로 생활세계를 이성적으로 따져가며 살 것인지는 선택의 문제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행위와 구조가 일으키는 부조리를 논리적 사고로 판단하는 것을 '불의'라 할 때, 불의에 분노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불의 때문에 화병이 나는 것도 문제다. 이 둘을 잘 조절하는 것이 동서고금의 교육원리(지덕체의 함양)다. 이 둘을 잘 조합한 이가 누구였는지는 잘 모르지만 성인으로 추앙받는 이들이 그들이 아닐까.
"깨달았다“, ”성령의 은사를 입었다“, ”견성을 이뤘다"는 말의 다른 말은 전두엽의 언어적, 논리적 사고행위를 중단하고 자율신경계의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게 충분히 훈련 받았다,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바꿔 말하면 현실세계를 언어적, 논리적으로 엄밀하게 파악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도 된다.
한 개인의 명상체험과 종교적 체험은 소중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개인적 체험만으로 무리하게 현실세계를 해석하려할 때, 전두엽 사회에 편도체 조절자가 무리하게 끼어들 때 문제가 발생하곤 한다. 개인적 특이체험의 일반화는 맹신과 독단을 낫는다.“일본지진은 예수를 믿지 않아서", “도를 아십니까”, “어리석은 중생들”이라는 말을 함부로 뇌까리는 것에서 그런 행태를 볼 수 있다.
필자는 아무래도 배부른 달마대사 보다는 가난한 인간이 낫지 싶다. '인간'이란 말에서도 나타나듯이 나란 존재는 타인의 얼굴을 통해 형성된, 연대하는 주체(레비나스)이기 때문이다. 괴롭고 고통스럽긴 하지만, 전두엽의 탐구와 비판, 문제해결 등에서 얻는 '성취감'이라는 놀라운 재미를 포기하면서까지 '자율신경계 조절자'가 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하나를 얻으면 분명 하나를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종교적 행위는 대부분의 무신론자들도 일상적으로 행하고 있다. 꽃꽂이, 낚시, 여행,모형수집, 뜨개질, 바둑, 개키우기, 연필 돌리기, 책수집, 연예인 팬활동, 악기연주, 음악감상, 트위터질 등. 일상에서 매일 반복되는 특정행위,징크스, 집착, 소아병적 애착 또한 일종의 종교적 행위(E-프롬)일 수 있기에, 타인에 해가되지 않고 내가 즐거워 하는 일의 달인이 될 수 있다면 이것 또한 성스러운 종교행위가 아닐까. 생활자체가 도 닦는 것, 기도하는 것이라는 말, 참으로 일리있다. 천국과 도가 뇌의 편도체에 있는 것이라면, 도는 산에 있지 않고 길에 있으며 천국은 너의 마음 속에 있고 한 곳에 머물지 아니하고 도처에 편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나를 깊이 들여다본다는 것은 나의 살아있는 동물성 Vital Sign을 느껴 본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전두엽에서 논리적, 언어적으로 표상된 경험을 반영한 변연계의 감정의 소용돌이를 조용히 지켜본다는 것이고, 자율신경계가 나를 어떻게 난도질하는지 유심히 바라보는 것이다.
기도를 통해 구원을 얻고 싶거나 명상을 통해 도인이 되고 싶거나 참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싶다면 ‘호흡’에 집중하면 된다. 호흡이야말로 내 의지로 자율신경계에 접근하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10년만 하면 소원성취할 것이다. 근데 그런 종교적 결단 없이 범부들도 10년 정도 한 가지 일에 매진한다면 그 분야에선 누구나 달인, 도인이 될 수 있다.
천국과 도를 구함에 있어서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없다. 차이가 있다면 한쪽은 100년 동안 아름다운 자연 다큐멘터리 영화 한편만 줄창 보는 반면, 한쪽은 액션, 스릴러, 미스테리, 멜로, SF, 드라마 모든 영화를 입맛에 맞게 다양하게 골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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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은 의식과 무의식도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말한다. 생각, 사고, 잡념, 고민, 걱정, 불안 등도 대뇌피질 전두엽에서 직간접적 경험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전두엽에 구조화된 의식은 동물뇌, 정서뇌라 불리는 변연계(특히 편도체)에 영향을 주고 걱정, 불안, 안도, 평안함 등을 일으킨다.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생각은 일종의 강박증, 노이로제, 집착증인데, 프로이드는 종교를 '집단신경증'이라 했다.
기도, 명상, 수련, 참선 등은 이런 전두엽의 논리적, 언어적 사고를 중단하고 우리 의지와 독립된 자율신경계를 안정상태로 조절해서 평안에 이르는 게 하는 방법들이다. 자율신경계를 우리 의지대로 조정하는 방법은 '호흡법'밖에 없는데, 그래서 명상, 참선 등을 행할 때 자신의 호흡에만 집중하는 것이 그런 연유에서다.
과거에 슈가레이 레너드라는 복서가 있었는데 이 선수의 반사 신경이 얼마나 빠른지 보통사람의 2배 정도였다고 한다. 옛 무사들의 지독한 수련은 반사신경을 증진시키 위한 것이었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칼놀림. 대뇌에서 보고 판단하고 명령을 내리기 전에 척수에서 명령을 내려버린다. 이것은 척수반사다. 훈련에 따라 운동선수들의 반사신경은 보통사람보다 2배 정도 증진시킬 수 있다고 한다.
깨달음, 무념무상, 견성, 종교적 체험은 대뇌피질, 전두엽의 논리적, 언어적 사고를 끊고 스스로 뇌의 변연계가 관장하는 자율신경계를 컨트롤 할 수 있다는 것의 다른 말이다. 이런 조절능력은 훈련, 수련을 통해 충분히 가능하다.
어떤 종교적 깨달음이 반드시 좋은 것인지는 이론이 있을 수 있다. 깨달음의 댓가로 전두엽의 논리적, 언어적 사고를 중지한 것이기에 구체적 삶의 변화를 합리적으로 판단하기에는 훈련이 부족하고 현실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능력은 저하될 수밖에 없다.
현실문제와 연관된 전두엽의 추리능력을 포기했으므로 당면한 가족사나 정치 경제 사회 문제에 대한 판단능력이 떨어지므로 현실 괴리감이 발생할 수도 있다. 흔히 현실감각이 없다, 현실도피자, 이상주의자, '도튼 중' 같다는 말을 듣곤 한다. 득도, 영성, 구원을 받을 것인지, 범부로 생활세계를 이성적으로 따져가며 살 것인지는 선택의 문제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행위와 구조가 일으키는 부조리를 논리적 사고로 판단하는 것을 '불의'라 할 때, 불의에 분노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불의 때문에 화병이 나는 것도 문제다. 이 둘을 잘 조절하는 것이 동서고금의 교육원리(지덕체의 함양)다. 이 둘을 잘 조합한 이가 누구였는지는 잘 모르지만 성인으로 추앙받는 이들이 그들이 아닐까.
"깨달았다“, ”성령의 은사를 입었다“, ”견성을 이뤘다"는 말의 다른 말은 전두엽의 언어적, 논리적 사고행위를 중단하고 자율신경계의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게 충분히 훈련 받았다,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바꿔 말하면 현실세계를 언어적, 논리적으로 엄밀하게 파악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도 된다.
한 개인의 명상체험과 종교적 체험은 소중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개인적 체험만으로 무리하게 현실세계를 해석하려할 때, 전두엽 사회에 편도체 조절자가 무리하게 끼어들 때 문제가 발생하곤 한다. 개인적 특이체험의 일반화는 맹신과 독단을 낫는다.“일본지진은 예수를 믿지 않아서", “도를 아십니까”, “어리석은 중생들”이라는 말을 함부로 뇌까리는 것에서 그런 행태를 볼 수 있다.
필자는 아무래도 배부른 달마대사 보다는 가난한 인간이 낫지 싶다. '인간'이란 말에서도 나타나듯이 나란 존재는 타인의 얼굴을 통해 형성된, 연대하는 주체(레비나스)이기 때문이다. 괴롭고 고통스럽긴 하지만, 전두엽의 탐구와 비판, 문제해결 등에서 얻는 '성취감'이라는 놀라운 재미를 포기하면서까지 '자율신경계 조절자'가 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하나를 얻으면 분명 하나를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종교적 행위는 대부분의 무신론자들도 일상적으로 행하고 있다. 꽃꽂이, 낚시, 여행,모형수집, 뜨개질, 바둑, 개키우기, 연필 돌리기, 책수집, 연예인 팬활동, 악기연주, 음악감상, 트위터질 등. 일상에서 매일 반복되는 특정행위,징크스, 집착, 소아병적 애착 또한 일종의 종교적 행위(E-프롬)일 수 있기에, 타인에 해가되지 않고 내가 즐거워 하는 일의 달인이 될 수 있다면 이것 또한 성스러운 종교행위가 아닐까. 생활자체가 도 닦는 것, 기도하는 것이라는 말, 참으로 일리있다. 천국과 도가 뇌의 편도체에 있는 것이라면, 도는 산에 있지 않고 길에 있으며 천국은 너의 마음 속에 있고 한 곳에 머물지 아니하고 도처에 편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나를 깊이 들여다본다는 것은 나의 살아있는 동물성 Vital Sign을 느껴 본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전두엽에서 논리적, 언어적으로 표상된 경험을 반영한 변연계의 감정의 소용돌이를 조용히 지켜본다는 것이고, 자율신경계가 나를 어떻게 난도질하는지 유심히 바라보는 것이다.
기도를 통해 구원을 얻고 싶거나 명상을 통해 도인이 되고 싶거나 참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싶다면 ‘호흡’에 집중하면 된다. 호흡이야말로 내 의지로 자율신경계에 접근하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10년만 하면 소원성취할 것이다. 근데 그런 종교적 결단 없이 범부들도 10년 정도 한 가지 일에 매진한다면 그 분야에선 누구나 달인, 도인이 될 수 있다.
천국과 도를 구함에 있어서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없다. 차이가 있다면 한쪽은 100년 동안 아름다운 자연 다큐멘터리 영화 한편만 줄창 보는 반면, 한쪽은 액션, 스릴러, 미스테리, 멜로, SF, 드라마 모든 영화를 입맛에 맞게 다양하게 골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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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4일 금요일
불법조업 중국어선 '조준사격'을 우려한다
< 불법조업 중국어선 '조준사격'을 우려한다 >
필자의 트위터 글, "비무장 민간인에게 '조준사격'? 심각한 국제법위반 아닌가? 조준에 맛드렸군화. RT @hanitweet: 해경, 불법조업 중국 어선에 첫‘조준사격’ http://bit.ly/g0dpoo" 에 대한 비판글이 트위터로 10개 이상 올라오고 있다.
한겨레 기사를 링크하고 간단한 맨션을 단 것인데 어디서 보았는지 윗 맨션에 대한 비판 글들이 아이폰에 간간히 뜬다.
일일히 나의 의견과 오해 소지에 대해 트위터리안들께 답글을 보내긴 했으나 [다음]포탈 사이트 해당 기사 밑에 소셜웹이라는 트위터 타임라인에 계속 떠 있기 때문에 뒤늦게 본 이가 똑 같은 비판글을 보내온다.
같은 답장을 계속 보낼 수는 없기에 나의 트위터 의견을 아래 모아보았다.
이번 해경 '조준사격'에 대한 나의 입장은 절대 반대한다,이다. 이유는 아래 트윗터에 쓴 글 참고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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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경, 불법조업 중국 어선에 첫 ‘조준사격’, 이 기사 제가 우려한 것. 과거 도끼든 중국선박들 '조준사격' 안 하고 어떻게 단속했는가. 아덴만식 과잉진압 안 했으면하구요. 60년4.19, 80년 광주, 튀니지, 리비아, 모두 '조준사격'이 문제였다는 걸 강조한 것예요.
예! 우리 해경 입장도 충분히 생각합니다. 제가 우려하는 것은 저는 '위협사격'과 '조준사격'의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자국정부가 있는 외국인에 대한 '조준사격'은 외교적 문제로 커질 수 있으니 '조준사격'외의 다른 방법을 쓰는 것이 좋을 것 같구요. '조준사격'이 단속의 주된 방법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외국인이 국내에서 범죄행위를 했다해도 '조준사격'하진 않지요. 법절차를 통해 범죄행위를 묻지 않나요? 중국입장에서 중국인을 '조준사격'하는 것은 중국을 조준사격하는 것으로 여길겁니다. 우리 불법어부들을 중죄도 아닌데 미국,일본,중국이'조준사격'한다면, 사실 그런예가 있는지 모르지만, 이건 아니다 싶군요.
제가 잘 모르지만, 배에는 망치,칼,도끼,나무봉, 이런게 많지 않나요. 뭐 무장한 민간인일 수도 있지만, 다리에 총맞은 중국어민이 '조준사격'에도 불구하고 만에 하나 죽는다면, 국제법을 어긴 불법 중국어선도 국제적 비난을 받겠지만, '조준사격'으로 불법조업 외국인을 죽인 나라는 더 심한 국제적 비난과 책임을 추궁당하지 않을까요? 경찰이 정당방위로 총을 쏘는 것은 어디까지나 경찰 개인 생명권 차원의 정당방위로 봐야지,불법범죄 외국인에 대한 '조준사격'을 공권력의 '원칙'으로 삼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그럴일이야 없겠지만 사망사고 나는 순간에 해경훈련문제와 동시에 외교분쟁화할 우려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조준사격' 그 취지는 이해하나 실행하지말고 다른 방법을 모색해 보았으면 합니다.
[다음]포탈 트위터 쇼셜왭에 <'해경,불법조업 중국어선에 첫 조준사격'>기사 밑에 제가 쓴 '조준사격'비판글이 쫙~. 반대의견에 집중포화 맞고 있네요. [다음] 밉네요. 이기사 비판했다고 기사밑에 걸어놓는짓 하지마세요. 이 정도 기사 비판못하면 그게국민인감?
...............
※ 위 트위터 글 받침, 띄어쓰기등 내용에 지장 주지 않는 선에서 약간 수정하였다.
일단, 여기까지 내 의견 올리고 좀 더 디테일한 분석글은 시간나는 대로 업데이트 시키고자 한다.
...
필자의 트위터 글, "비무장 민간인에게 '조준사격'? 심각한 국제법위반 아닌가? 조준에 맛드렸군화. RT @hanitweet: 해경, 불법조업 중국 어선에 첫‘조준사격’ http://bit.ly/g0dpoo" 에 대한 비판글이 트위터로 10개 이상 올라오고 있다.
한겨레 기사를 링크하고 간단한 맨션을 단 것인데 어디서 보았는지 윗 맨션에 대한 비판 글들이 아이폰에 간간히 뜬다.
일일히 나의 의견과 오해 소지에 대해 트위터리안들께 답글을 보내긴 했으나 [다음]포탈 사이트 해당 기사 밑에 소셜웹이라는 트위터 타임라인에 계속 떠 있기 때문에 뒤늦게 본 이가 똑 같은 비판글을 보내온다.
같은 답장을 계속 보낼 수는 없기에 나의 트위터 의견을 아래 모아보았다.
이번 해경 '조준사격'에 대한 나의 입장은 절대 반대한다,이다. 이유는 아래 트윗터에 쓴 글 참고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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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경, 불법조업 중국 어선에 첫 ‘조준사격’, 이 기사 제가 우려한 것. 과거 도끼든 중국선박들 '조준사격' 안 하고 어떻게 단속했는가. 아덴만식 과잉진압 안 했으면하구요. 60년4.19, 80년 광주, 튀니지, 리비아, 모두 '조준사격'이 문제였다는 걸 강조한 것예요.
예! 우리 해경 입장도 충분히 생각합니다. 제가 우려하는 것은 저는 '위협사격'과 '조준사격'의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자국정부가 있는 외국인에 대한 '조준사격'은 외교적 문제로 커질 수 있으니 '조준사격'외의 다른 방법을 쓰는 것이 좋을 것 같구요. '조준사격'이 단속의 주된 방법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외국인이 국내에서 범죄행위를 했다해도 '조준사격'하진 않지요. 법절차를 통해 범죄행위를 묻지 않나요? 중국입장에서 중국인을 '조준사격'하는 것은 중국을 조준사격하는 것으로 여길겁니다. 우리 불법어부들을 중죄도 아닌데 미국,일본,중국이'조준사격'한다면, 사실 그런예가 있는지 모르지만, 이건 아니다 싶군요.
제가 잘 모르지만, 배에는 망치,칼,도끼,나무봉, 이런게 많지 않나요. 뭐 무장한 민간인일 수도 있지만, 다리에 총맞은 중국어민이 '조준사격'에도 불구하고 만에 하나 죽는다면, 국제법을 어긴 불법 중국어선도 국제적 비난을 받겠지만, '조준사격'으로 불법조업 외국인을 죽인 나라는 더 심한 국제적 비난과 책임을 추궁당하지 않을까요? 경찰이 정당방위로 총을 쏘는 것은 어디까지나 경찰 개인 생명권 차원의 정당방위로 봐야지,불법범죄 외국인에 대한 '조준사격'을 공권력의 '원칙'으로 삼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그럴일이야 없겠지만 사망사고 나는 순간에 해경훈련문제와 동시에 외교분쟁화할 우려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조준사격' 그 취지는 이해하나 실행하지말고 다른 방법을 모색해 보았으면 합니다.
[다음]포탈 트위터 쇼셜왭에 <'해경,불법조업 중국어선에 첫 조준사격'>기사 밑에 제가 쓴 '조준사격'비판글이 쫙~. 반대의견에 집중포화 맞고 있네요. [다음] 밉네요. 이기사 비판했다고 기사밑에 걸어놓는짓 하지마세요. 이 정도 기사 비판못하면 그게국민인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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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트위터 글 받침, 띄어쓰기등 내용에 지장 주지 않는 선에서 약간 수정하였다.
일단, 여기까지 내 의견 올리고 좀 더 디테일한 분석글은 시간나는 대로 업데이트 시키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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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18일 금요일
양화대교의 모든 것(시정보고서)[퍼옴]
멀쩡한 양화대교(안전등급 B), 왜 공사 중인가?
의정보고서 | 2011/01/20 21:31
환경파괴는 물론 경제적 타당성마저 결여된 서해뱃길 조성사업의 첫 삽이 바로 양화대교 구조개선사업(총사업비 415억원)이다.
동 사업은 안전과 교통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멀쩡한 다리(안전도 B등급)를 부수고, 5천톤급 이상의 크루즈유람선이 드나들 수 있도록 교각간의 거리를 현행 35~42M에서 112M로 넓힌다는 미명 하에 혈세를 낭비하고 있는 오시장의 대표적 전시성사업 중 하나이다.
최근 서울시의 양화대교 공사와 관련한 태도를 보면 시민과 시의회가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대외적으로는 ‘하류측 교량 완공에 필요한 85억원을 포함해 예산 전액(182억(채무부담상환액 30억 포함))을 시의회가 삭감했기 때문에 중단위기에 처해 있다.’고 책임을 시의회에 전가하면서도 대내적으로는 시의회측과 비공식 접촉을 통해 하류측 교량공사비(85억)만 주면 공사를 할 수 없다. 대신 공사비 전액(182억)을 주면 공사를 조속히 끝내겠다’는 ‘비현실적인 조건’을 걸고 시의회를 압박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서울시의회 민주당은 ‘양화대교의 조속한 정상화’라는 본질적인 문제는 외면 한 채, 공식적으로는 ‘돈 없어 못한다’고 비난의 화살을 시의회에 돌리면서도 비공식적으로는‘전체공사를 할 수 있도록 용인해주면, 예비비를 써서라도 공사를 빨리 끝내겠다’며 시의회를 압박하는, 이른바 양동작전을 구사하고 있는 서울시와 오세훈 시장의 이중적 행태에 대해 분노를 금할 길이 없다.
이에 서울시의회 민주당은 다음과 같은 입장을 다시 한 번 만천하에 천명하는 바이다.
1. 우리 민주당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시민의 생명과 안전이 최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밝힌다.
이런 대원칙에 따라 하류측 다리의 정상화에 필요한 모든 비용(85억원)은 예비비를 사용하든, 전용을 하든지 조건 없이 허용할테니, 서울시도 전체공사비 운운하지 말고 조건없이 하류측 교량공사를 조속히 마무리하라.
2. 양화대교 상류측 교량은 털끝하나 건드리지 말고 현상유지하라.
다만, 하류측 교량공사는 물리적으로 볼 때 이미 원상회복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섰다는 점을 감안하여 공사를 조속히 끝낸 후 양화대교 상하류측 통행로 모두를 직선으로 펴고 정상화하라.
서울시가 양화대교 전체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볼모로 삼아 양화대교 하류측 구조개선공사를 고의적으로 지연시키려든다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서울시에 있음을 밝혀둔다.
■ 양화대교 관련 논란에 대한 Q & A
1. ‘양화대교 하류측 교량 구조개선공사만하고, 상류측 교량은 현 상태로 둔다면 안전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에 대하여
- 양화대교는 안전에 전혀 문제가 없는 양호(안전등급 B등급)한 교량이다. 멀쩡한 다리를 부수고 아치교로 바꿔 크루즈급 유람선이 통과할 수 있도록 구조개선공사를 강행하는 과정에서 S자 모양으로 구부러진 우회로를 개설해 차량을 통행시키고 있는데서 교통사고 위험이 높아진 것뿐이다.
따라서 하류측 교량공사만 마무리하고 상류측 다리는 그대로 둔채 공사를 종결시켜도, 양화대교는 종전처럼 직선다리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정상적인 다리가 된다.
2.'벌써 7개월 째 공사가 중단되었다’, ‘기형적인 모습으로 방치된 지 7개월이 됐다’는 보도와 관련하여
- 양화대교는 지난해 2월 착공후, 6.22 시의회 민주당 당선자들의 요구로 서울시가 9.13까지 상판철거작업을 중단했다. 그러나 나머지 다른 공정, 즉 상류측 다리와 하류측 다리에 거치할 아치교 2개의 공장제작 작업은 ‘중단 없이’ 그대로 진행돼왔다.
하류측 교량의 경간을 넓히는 공사는 크게 4단계로 구분된다.
상류측교량 측면에 가교를 설치하고, 하류측 교량의 교통을 차단하여 S자형 우회로를 개설하는 것이 1단계이다. 2단계는 상판을 철거하는 단계이며, 3단계는 교각철거 및 보강단계이다. 마지막으로, 4단계는 아치거치, 포장 및 안전시설 등을 설치하는 단계이다.
(→이후 상류측 교량의 경간을 넓히기 위해서는 위 절차를 반복하여 진행시킨다)
20일 현재 현재 4단계 공정에 돌입하기 위한 뒷마무리작업(절단된 교각 뿌리를 강바닥 보다 낮게 제거하는 작업) 중 이다. 공장에서 제작한 하류측 아치교는 교각 위에 거치하기 위해 이미 현장으로 운반해 놓은 상태이다.
3. 시의회가 전액 삭감한 양화대교예산 182억원 중 82억원은 하류측 다리개통에 필요한 돈이고, 특히 82억원 중 30억원은 외상공사, 즉 지난해 채무부담행위로 인해 올해 갚아야 할 법정상환액인데도 불구하고 이마저도 시의회가 불법적으로(지방재정법 제44조제2항(채무부담이 되는 행위를 한 때에는 상환하는 회계연도 세출예산에 반드시 계상하여야 한다) 삭감했다는 서울시의 주장에 대해
- 행정안전부의 지침(2011년도 지방자치단체 예산편성 운영기준 및 기금운용계획 수립기준, 344쪽)에 따르면 지출을 요하는 연도에는 다시 그 소요경비를 당해연도 세출예산에 계상하여 의회의 의결을 얻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2011년도 서해뱃길 사업과 관련하여 한강사업본부가 제출한 예산서, 예산안설명서 등 어떤 자료에도 ‘채무부담상환액 30억’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었다는 점(참고로 수도사업특별회계 예산서(219쪽)을 보면, 송배수관 정비사업비(403억5천만원)의 산출내역 중 ‘채무부담상환액’ 46억원을 명시적으로 적시하고 있다),
또한, 동 사업의 예산심의와 관련하여 서울시 예산과에서 시의회에 제출한 ‘2007년-2011년 채무부담행위 현황’자료에도 동 채무부담행위의 원인행위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즉, ‘미계약’ 상태이고 실제사용액이 ‘0원’이라고 적시되어 있다는 점,
특히, 환수위의 예비심사과정 나아가서 예결위의 본 심사과정을 통틀어서 ‘채무상환 30억’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나 항변이 없었다는 점(속기록 어디에도 관련 답변이나 이의제기가 없음) 등을 고려해 볼 때 ‘시의회가 불법적으로 삭감했다’, '보복성 삭감이다.’고 호도하는 서울시의 주장은 자신들의 업무파악 소홀, 실수, 그리고 책임을 시의회에 전가시키는 전형적인 적반하장(賊反荷杖) 행위에 불과하다.
4. 시의회가 관련 예산을 전액 삭감하고 나서 이제 와서 하류측 교량 정상화에 필요한 비용(85억)만은 예비비로 쓰라고 말하는 건 자기모순 아니냐는 서울시의 주장에 대해
- 시의회가 서해뱃길사업비 752억원 전액을 삭감한 이유는 전시성사업에 대한 단호한 거부의사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양화대교 하류측 공사비마저도 삭감한 의도는 공사비를 일부라도 줄 경우 서울시가 이를 빌미로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상류측 공사까지 강행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예비비를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 서울시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즉, “돈이 없으니, 하류측 공사도 중단해야 할 판이다. 예비비 사용도 하류측 공사만을 위해 사용할 수는 없다. 이왕에 주는 것이면 상류측 공사까지 허용해 달라. 그러면 예비비를 사용해서라도 공사를 조속히 끝내겠다. 그렇지 않으면 공사를 중단할 수밖에 없다.”고 시의회를 교묘하게 압박하고 있다.
겉으로는 시민의 안전 운운하고 있지만, 정작 ‘양화대교 정상화’라는 본질적 문제는 외면한 채, 양화대교 전체공사비를 (시의회로부터) 확보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볼모로 삼아 하류측 경간확장 잔여공사를 ‘고의적으로’ 지연시키는 고도의 전술을 구사하고 있지는 않은 지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시의회가 전액 삭감한 사업 일부에 대해 집행부에게 예비비라도 사용하라고 촉구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결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회가 예비비를 사용해도 좋으니, 하류측 다리 공사를 조속히 끝내라고 공개적으로 촉구하는 건 “강 건너 불구경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방증으로 이해해 달라. 우리 민주당은 그 무엇도 시민의 생명과 안전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대원칙에 입각하여 고심 끝에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점을 거듭 밝힌다. (끝)
※ 다음엔 기사형태로, 네이버엔 시의원 블로그에 게재된 글인데, 두 곳다 동시에 갑자기 삭제되어 이곳에 옮겨 놓습니다. 게시자가 자진 삭제한 것인지, 삭제 당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자료적 가치가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 허락없이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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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보고서 | 2011/01/20 21:31
환경파괴는 물론 경제적 타당성마저 결여된 서해뱃길 조성사업의 첫 삽이 바로 양화대교 구조개선사업(총사업비 415억원)이다.
동 사업은 안전과 교통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멀쩡한 다리(안전도 B등급)를 부수고, 5천톤급 이상의 크루즈유람선이 드나들 수 있도록 교각간의 거리를 현행 35~42M에서 112M로 넓힌다는 미명 하에 혈세를 낭비하고 있는 오시장의 대표적 전시성사업 중 하나이다.
최근 서울시의 양화대교 공사와 관련한 태도를 보면 시민과 시의회가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대외적으로는 ‘하류측 교량 완공에 필요한 85억원을 포함해 예산 전액(182억(채무부담상환액 30억 포함))을 시의회가 삭감했기 때문에 중단위기에 처해 있다.’고 책임을 시의회에 전가하면서도 대내적으로는 시의회측과 비공식 접촉을 통해 하류측 교량공사비(85억)만 주면 공사를 할 수 없다. 대신 공사비 전액(182억)을 주면 공사를 조속히 끝내겠다’는 ‘비현실적인 조건’을 걸고 시의회를 압박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서울시의회 민주당은 ‘양화대교의 조속한 정상화’라는 본질적인 문제는 외면 한 채, 공식적으로는 ‘돈 없어 못한다’고 비난의 화살을 시의회에 돌리면서도 비공식적으로는‘전체공사를 할 수 있도록 용인해주면, 예비비를 써서라도 공사를 빨리 끝내겠다’며 시의회를 압박하는, 이른바 양동작전을 구사하고 있는 서울시와 오세훈 시장의 이중적 행태에 대해 분노를 금할 길이 없다.
이에 서울시의회 민주당은 다음과 같은 입장을 다시 한 번 만천하에 천명하는 바이다.
1. 우리 민주당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시민의 생명과 안전이 최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밝힌다.
이런 대원칙에 따라 하류측 다리의 정상화에 필요한 모든 비용(85억원)은 예비비를 사용하든, 전용을 하든지 조건 없이 허용할테니, 서울시도 전체공사비 운운하지 말고 조건없이 하류측 교량공사를 조속히 마무리하라.
2. 양화대교 상류측 교량은 털끝하나 건드리지 말고 현상유지하라.
다만, 하류측 교량공사는 물리적으로 볼 때 이미 원상회복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섰다는 점을 감안하여 공사를 조속히 끝낸 후 양화대교 상하류측 통행로 모두를 직선으로 펴고 정상화하라.
서울시가 양화대교 전체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볼모로 삼아 양화대교 하류측 구조개선공사를 고의적으로 지연시키려든다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서울시에 있음을 밝혀둔다.
■ 양화대교 관련 논란에 대한 Q & A
1. ‘양화대교 하류측 교량 구조개선공사만하고, 상류측 교량은 현 상태로 둔다면 안전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에 대하여
- 양화대교는 안전에 전혀 문제가 없는 양호(안전등급 B등급)한 교량이다. 멀쩡한 다리를 부수고 아치교로 바꿔 크루즈급 유람선이 통과할 수 있도록 구조개선공사를 강행하는 과정에서 S자 모양으로 구부러진 우회로를 개설해 차량을 통행시키고 있는데서 교통사고 위험이 높아진 것뿐이다.
따라서 하류측 교량공사만 마무리하고 상류측 다리는 그대로 둔채 공사를 종결시켜도, 양화대교는 종전처럼 직선다리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정상적인 다리가 된다.
2.'벌써 7개월 째 공사가 중단되었다’, ‘기형적인 모습으로 방치된 지 7개월이 됐다’는 보도와 관련하여
- 양화대교는 지난해 2월 착공후, 6.22 시의회 민주당 당선자들의 요구로 서울시가 9.13까지 상판철거작업을 중단했다. 그러나 나머지 다른 공정, 즉 상류측 다리와 하류측 다리에 거치할 아치교 2개의 공장제작 작업은 ‘중단 없이’ 그대로 진행돼왔다.
하류측 교량의 경간을 넓히는 공사는 크게 4단계로 구분된다.
상류측교량 측면에 가교를 설치하고, 하류측 교량의 교통을 차단하여 S자형 우회로를 개설하는 것이 1단계이다. 2단계는 상판을 철거하는 단계이며, 3단계는 교각철거 및 보강단계이다. 마지막으로, 4단계는 아치거치, 포장 및 안전시설 등을 설치하는 단계이다.
(→이후 상류측 교량의 경간을 넓히기 위해서는 위 절차를 반복하여 진행시킨다)
20일 현재 현재 4단계 공정에 돌입하기 위한 뒷마무리작업(절단된 교각 뿌리를 강바닥 보다 낮게 제거하는 작업) 중 이다. 공장에서 제작한 하류측 아치교는 교각 위에 거치하기 위해 이미 현장으로 운반해 놓은 상태이다.
3. 시의회가 전액 삭감한 양화대교예산 182억원 중 82억원은 하류측 다리개통에 필요한 돈이고, 특히 82억원 중 30억원은 외상공사, 즉 지난해 채무부담행위로 인해 올해 갚아야 할 법정상환액인데도 불구하고 이마저도 시의회가 불법적으로(지방재정법 제44조제2항(채무부담이 되는 행위를 한 때에는 상환하는 회계연도 세출예산에 반드시 계상하여야 한다) 삭감했다는 서울시의 주장에 대해
- 행정안전부의 지침(2011년도 지방자치단체 예산편성 운영기준 및 기금운용계획 수립기준, 344쪽)에 따르면 지출을 요하는 연도에는 다시 그 소요경비를 당해연도 세출예산에 계상하여 의회의 의결을 얻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2011년도 서해뱃길 사업과 관련하여 한강사업본부가 제출한 예산서, 예산안설명서 등 어떤 자료에도 ‘채무부담상환액 30억’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었다는 점(참고로 수도사업특별회계 예산서(219쪽)을 보면, 송배수관 정비사업비(403억5천만원)의 산출내역 중 ‘채무부담상환액’ 46억원을 명시적으로 적시하고 있다),
또한, 동 사업의 예산심의와 관련하여 서울시 예산과에서 시의회에 제출한 ‘2007년-2011년 채무부담행위 현황’자료에도 동 채무부담행위의 원인행위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즉, ‘미계약’ 상태이고 실제사용액이 ‘0원’이라고 적시되어 있다는 점,
특히, 환수위의 예비심사과정 나아가서 예결위의 본 심사과정을 통틀어서 ‘채무상환 30억’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나 항변이 없었다는 점(속기록 어디에도 관련 답변이나 이의제기가 없음) 등을 고려해 볼 때 ‘시의회가 불법적으로 삭감했다’, '보복성 삭감이다.’고 호도하는 서울시의 주장은 자신들의 업무파악 소홀, 실수, 그리고 책임을 시의회에 전가시키는 전형적인 적반하장(賊反荷杖) 행위에 불과하다.
4. 시의회가 관련 예산을 전액 삭감하고 나서 이제 와서 하류측 교량 정상화에 필요한 비용(85억)만은 예비비로 쓰라고 말하는 건 자기모순 아니냐는 서울시의 주장에 대해
- 시의회가 서해뱃길사업비 752억원 전액을 삭감한 이유는 전시성사업에 대한 단호한 거부의사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양화대교 하류측 공사비마저도 삭감한 의도는 공사비를 일부라도 줄 경우 서울시가 이를 빌미로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상류측 공사까지 강행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예비비를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 서울시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즉, “돈이 없으니, 하류측 공사도 중단해야 할 판이다. 예비비 사용도 하류측 공사만을 위해 사용할 수는 없다. 이왕에 주는 것이면 상류측 공사까지 허용해 달라. 그러면 예비비를 사용해서라도 공사를 조속히 끝내겠다. 그렇지 않으면 공사를 중단할 수밖에 없다.”고 시의회를 교묘하게 압박하고 있다.
겉으로는 시민의 안전 운운하고 있지만, 정작 ‘양화대교 정상화’라는 본질적 문제는 외면한 채, 양화대교 전체공사비를 (시의회로부터) 확보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볼모로 삼아 하류측 경간확장 잔여공사를 ‘고의적으로’ 지연시키는 고도의 전술을 구사하고 있지는 않은 지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시의회가 전액 삭감한 사업 일부에 대해 집행부에게 예비비라도 사용하라고 촉구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결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회가 예비비를 사용해도 좋으니, 하류측 다리 공사를 조속히 끝내라고 공개적으로 촉구하는 건 “강 건너 불구경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방증으로 이해해 달라. 우리 민주당은 그 무엇도 시민의 생명과 안전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대원칙에 입각하여 고심 끝에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점을 거듭 밝힌다. (끝)
※ 다음엔 기사형태로, 네이버엔 시의원 블로그에 게재된 글인데, 두 곳다 동시에 갑자기 삭제되어 이곳에 옮겨 놓습니다. 게시자가 자진 삭제한 것인지, 삭제 당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자료적 가치가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 허락없이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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