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3일 목요일

심리학주의를 경계한다

심리학으로 모든 정치경제, 사회현상, 정의와 부정의를 설명하는 풍토가 유행이라면, 그 사회는 상당히 위험한 사회다.

필자는 아래 글에서 심리학이 어떻게 독점과 독재를 유지, 은폐하며 '구조(system)'의 문제를 우리의 시선으로부터 떼어 놓는 지에 대해 말할 것이다. 또한 세계적으로 만연한 심리학 과잉의 문제에 숨겨진 본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필자는 심리학 전부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속류 심리학의 과도한 정치경제에의 개입으로 발생하는 “모든 책임의 민영화”, 이 같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심리학적 기재에 대해 따져볼 것이다.
 

1. 심리학적 시선은 또 다른 권력이다.


권력자는 대게 자신에게 비판적인 사람들을 단순한 선동가에 불과하며 배제된 자들의 '인정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소송과 구금으로 정신적, 물리적 재갈을 물린다. 정치적 반대자를 정신병자로 모는 이런 행태는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정치적 반대자들의 합리적 주장은 속류심리학에서 말하는 '인정욕구'가 아니라 사회학에서 말하는 '시민참여정신'이다.

인정욕구는 호모사피엔스면 누구나가 갖고 있는 인간 본능 중의 하나다. 정치경제적 반대자들의 합리적 비판을 치기어린 인정욕구로 간주하고, 비정상으로 몰아 감시, 구금하는 일은 독재적 권력자들의 한결같은 레파토리였다. 이런 독재적 권력자와 공모하는 심리학적 시각이 우리 정치와 거품경제시장에 만연해 있다. 이 같은 심리학적 시각의 과잉을 필자는 '심리학주의'라 부를 것이며 암암리에 자본과 권력의 이익에 봉사하는 심리학을 '속류심리학'이라 부를 것이다.

심리학은 상당히 개별적이며 상대적이고 객관화가 어려운 학문이니만큼 사회현상, 사회구조 모두를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쉽게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높다. 사실상 심리학은 아직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과 같은 과학분야로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과학이어야 객관화, 계량화가 가능하고 사회정책 등에 실용가능하다. 사회경제 정책에서 '과학적'이라는 것은 '객관성'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심리학주의가 우려되는 것은 이들 학자들이 시민과 네티즌들을 보는 방식에 권력(=시각)문제가 개입해 있기 때문이다. 누가 어떤 수단을 통해 어떤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시민과 네티즌이 '악플러집단'이 될 수 있고 '비판적 시민집단'이 될 수도 있다. 응시, 시선은 권력으로 작용한다.

다 알다시피 푸코는 벤담의 파놉티콘에서 간수는 모든 죄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지만 죄수들은 간수를 보지 못함을 지적하면서 시선이 주는 권력효과에 대해 언급한바 있다.  요즘 우리사회 '사회심리학적 시선'은 국민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감시하는 것 같은 특별한 시선으로 존재한다. 속류 심리학자들은 이미 권력을 지닌 우월한 위치에 서 있다.

권력자들이 심리학적 시선 하에 시민과 네티즌의 건강한 비판과 풍자를 광기, 마녀사냥, 쾌감, 학벌 컴플렉스, 인정욕구 등으로 가두어놓는 행위는 온당치 못하다. SNS 집단지성이 권력자의 비리에 각종 의혹을 제기하는 것과 검증하는 행위는 사회학적 시선으로 풀자면 자발적인 '시민참여정신'이다.

쉽게 설명하면 이런 것이다. 촛불 들고 광장으로 나가는 게 원천봉쇄된 시민들은 네티즌으로 뭉치고 자발적으로 진실과 정의를 외친다. 네티즌이 시민인 셈이다. 이것은 분명한 사회현상이고 사회학적 분석 대상이지, 심리학적 팬덤현상, 동조현상인 것만은 아니다.

 

2. 심리학을 이용하는 권력자들


우리사회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심리학 과잉은 정치, 사회, 경제적 필요에 의한 것이다. 우선, 독재와 독점은 시민사회와 자유시장에서 개개인을 파편화시킬 필요가 있다. 정치와 시장에서 발생한 모든 책임을 권력과 기득권, 자본을 쥔 자의 위치에서 손해 본 개인인 너의 입장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데에 심리학만큼 유용한 학문도 없다.

모든 잘못은 심리학적으로 개개인의 '착각'과 '상황'에 의한 것이지 누군가 의도한 결과는 아니다 는 것을 심어주기에는 심리학이 제격이다. 심리학은 사람들로 하여금 명백한 착취와 억압, 진실의 왜곡 속에서 그것이 나의 문제, 나의 착각, 상황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을 갖게 만든다. 이런 운명적인, 나약한 소비자, 시민, 국민을 절대로 고마워하는 부류가 누굴까.

바로 4대강 건설을 운하건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부당한 정치권력, 자신의 정당성을 확고히 하기위해 개인적 성공이데올로기를 확대재생산하는, 성공한 학력위조 기득권집단, 소비자들을 우롱하고 불량제품(급발진 사고 등)을 계속 팔아먹기 위한 개인의 책임 이데올로기 만들기에 몰두하는 삼성을 비롯한 불량대기업, 신을 긍정적으로 믿으면 천국갈 수 있다는 종교적 신념에 개인을 묶어두기에 혈안이 된 종교기업, 바로 이런 부류다.

너의 삶이 어렵고 힘들고 사기당한 것처럼 보여도 그런 생각은 너란 개인이 '착각'한 것이다. 네티즌들의 선동이라는 '상황'에 휩쓸린 너는 '부정적 착각'을 버리고, "내일은 오늘보다 낫겠지"하는 근거 없는 '긍정적 착각'속에서 묻지도 따지지도 의심하지도 말고 살라. 이와 같은 당대의 지배 이데올로기 속에 이러한 심리학적 장치들이 교묘하게 개개인들에게 파고들고 있다.

구조(시스템)가 잘못된 게 아니라 개인, 네가 잘못되어 있다는 얘기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문제이기에 앞서 소비자, 시민인 너 개인이 '욕망'하고 '비합리적 선택'을 하는 지극히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적 경제위기와 독재적 정치 상황이란 그런 선택을 한 너의 잘못이지, 1%의 우리 잘못은 아니다. 너희들이 그 제품을 선택했고, 그 정치인을 뽑지 않았느냐. 뭐 이런 얘기다.


3. 심리학 과잉의 시대

1) 범죄심리학부터 살펴보자.


왜, 요즘  언론에서 사회병리니, 소시오패스니, 신드롬, 신경증, 정신병 등이라는 용어가 과거 보다 더 기승을 부릴까. 우리나라 정신병리학이 더욱 발전했기 때문일까. 심리학이 발달해서 일까. 더 많은 사회심리학 연구가 이루어졌기 때문일까.

요즘 우리사회에 다양한 범죄가 날로 증가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무슨 프로파일러, 범죄 심리학자들이 각광받고 있다. 그러나 전문 프로파일러가 필요한 강력범죄는 전체 범죄 중 매우 특수한 경우에 불과하다. 우리사회에서 특수한 범죄심리학이 필요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범죄심리학, 프로파일러 없이도 대부분의 강력범죄는 해결된다. 사람들이 범죄심리학이 주는 흥미로움에 푹 빠지는 이유는 FOX TV를 비롯한 선정적인 미국 드라마 역할이 꽤 클 거라고 생각한다.

세계적으로 묻지마 살인이 증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자살률 세계 1위 국가다. 이 같은 모든 범죄행위들이 범죄자들의 심리적 상태분석만으로 설명이 될까. 우리나라에서 자살한 연예인, 유명인들은 참 이상하게도 그 원인이 하나같이 우울증이다. 자살 동기가 심리학적으로 볼 때, 우울증 때문인 것이 진정 전부인가. 살인이나 자살 배후에 우리사회에 죽음을 강요하는 어떤 모순적인 사회시스템은 없는가.

모든 원인을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의 심리상태로 보는 범죄 심리학은 너무도 불성실해 보인다. 범죄를 부추기는 사회시스템을 분석해 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선 '사회학적 시선'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사회는 모든 범죄의 원인을 인간의 심리상태에서 찾으려는, 개인의 유전적 결함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는 '심리학주의'가 판치고 있다. 범죄의 원인은 개인의 심리상태 때문이라는 거다. 범인이나 피해자나 개인책임이라는 얘기다.

그럼 경찰은 어디갔나. 이때 정부와 재벌, 용역은 그 뒤로 숨는다. 권력은 바로 개인의 등 뒤에 숨어서 행사되고 있다. 범죄의 개인책임 속에는 신자유주의적 '작은 정부'가 도사리고 있다. 모든 책임의 '민영화'. 이것이 신자유주의 속의 범죄 심리학의 역할이다.
 

2) 경제도 심리다?


소비심리학은 말한다. 자유시장 민주주의 사회에 사는 당신은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동시에, '착각'할 수 있는 존재다. 당신이 남대문에서 1만원하는 옷을 유명 백화점에서 100만원에 산 것도 심리학적으로는 충분히 설명가능 함으로 억울해하지 말라. 너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상황'에 이끌려 그렇게 샀으니 심리학적으로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라. 바로 그게 '트랜드'라는 거다.  이런 메시지가 심리학자들을 앞세워서 대중을 우민화 시키고 있다.

많이 들어본 말, "경제는 심리다", 과연 그럴까. 현 정부 들어와서 경제가 단순 수요/공급에 따라 움직인다는 기본적인 팩트도 심리학 앞에서 그 의미가 없어져 버리고 만다. 경제가 '심리'임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주로 부동산소유자, 재벌, 은행, 투자금융회사들이다. 경제를 심리로 몰아야 '팩트'를 감출수 있고, 조중동으로 대변되는 재벌 대변지들이 재벌, 자본가, 부자들의 아파트 부동산, 자동차, 산업제품들은 재고처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취임초기 주가 5000 간다고 사람들의 심리에 호소했을 때, 이미 세계 경제는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이 터진 상황이었고, 경제상황이 암담했었다. 팩트에 입각한 한 사람이 과감히 소리쳤다. "경제는 심리가 아니다", "팩트다"라고. 그는 경제적으로 부정적 심리를 유발하여 한국경제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고 잡혀갔다. 미네르바가 그다. 우리시대 미네르바는 대표적인 '악플러'이자 '희생양'이었다. 대체로 '심리'는 권력자, 자본가, 부자들의 것인 반면 '팩트'는 의혹을 제기하고 진실을 밝히려는 민중의 것이기 쉽다. 흔히 투기꾼 부자들은 '심리'를 '트랜드'라는 이름으로 바꿔 부르기를 좋아한다.

자, 어떠한가. 집 좀 잘 팔리고 살림살이 좀 나아졌나. 아닐 것이다. 각종 경제 지표가 암울하다. 경제가 '심리'한테 된통 당한 거다. '소비심리학'이 각광 받을 때는 경제 하강기가 아닌 상승세일 때다. 이것 또한 '과소비'에 기댄 심리학의 장난이다. 분명히 경제는 '심리'가 아니라 '팩트'다. 먹고 자고 입고 일하고 노는 것만큼 분명한 팩트가 어디 있을까. 의식주를 심리문제로 보는 것은 종교에서나 가능하다. 바로 신자유주의 정치경제질서, 금융자본주의의 논리가 바로 '신앙'이다.

지배권력과 기득권집단, 경제적 특권집단이 최대한의 이익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자주 쓰는 것이 속류 심리학이다. 사회심리학은 대중을 속이고 지배권력의 유지를 위해 오늘도 꾸준히 여론을 호도하며 모든 문제의 원인을 개인책임으로 전가시킨다. 이쯤 되면 지배권력, 기득권이 독점한 '심리학적 시각의 과잉'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할 때가 되지 않았나한다.


3) 성공 심리학의 거짓말


흔히 세속적인 성공 심리학은 "큰 거짓말에 대한 긍정적 착각이 성공에 이르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 중에 성공하는 이는 1명뿐, 나머지는 절망, 파탄, 낙오, 좌절감에 시달린다. 그래서 사회는 낙오자들을 위한 '사회복지'를 한다. 성공심리학은 바로 로또복권이나 마찬가지다.

어느 부모가 자식에게 '작은' 긍정적 거짓말만 할까. 다 서울대 깜이다, 장군 깜이다, 미스코리아 깜이다, 라고 '큰' 긍정적 거짓말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큰 거짓말로 인해 소위 성공(?)에 이르게 되어 많은 사람에게 원성을 사고 있는 경우가 뉴스에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세속적 성공 뒤에는 반드시 과장과 부풀리기, 위조와 같은 거짓말이 자리하고 있다.

20세기에 통했던 큰 거짓말이 21세기 통하지 않는 이유는 언론통제와  정보독점 현상이 정보통신혁명과 SNS 발전에 힘입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데 있다. 실시간 현장 생중계와 정보검색이 가능한 시대에 20세기형 큰 거짓말은 실시간으로 들통 나고 말기 때문이다. 이제 큰 거짓말이 작은 거짓말 보다 더 효과적인 시대는 끝났다.

광우병, 4대강 사업, 천안함의 진실, 부동산 상승론, 경제 회복론, 주가 5000 시대 등등. 이제는 이 희망찬 언설들이 거짓인지, 아닌지 여부는 스마트폰이라는 손바닥 안에서 다 판명 나고 마는 시대가 온 것이다. 큰 거짓말이든, 작은 거짓말이든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는 셈이다. 독재와 독점, MB의 언론장악이 가능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은 요즘 사회에서는 불가능에 가깝다. SNS 시대 소비자들은 감시도 당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권력을 역감시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대중들은 냄비처럼 잠시 들끓다 마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 손바닥 스마트폰에는 모든 증거와 자료들이 수 십 년 고스란히 보존된다. 필요한 기억은 언제든지 재생가능하고, 진실이 사라지는 순간, 언제든지 실시간으로 되살려내며 다시 여론화시킬 수 있다. 성공이데올로기 이면의 거짓말은 언제든지 들통 나게 되어 있다. 지금, 사람들은 SNS에 '성공' 대신에 '행복'을 소통하고 있다.


 

4. 사회학적 시각이 필요하다


요즘처럼 우리사회에 '사회학적 시각'이 절실히 필요한 때도 없었다. 사회과학적 분석이 오류투성이고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면 사회정책, 법, 제도, 하다못해 도로, 항만, 신호등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그래도 사람들은 신호등 시스템을 믿고 건널목을 잘만 건넌다. 이를 위해 개인의 호 불호를 최대한 고려한 ‘사회조사’가 필요하고, 그런 결과를 토대로 신뢰할 수 있는 약속된 사회 시스템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회학적 시선'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우리사회에서 그 쟁쟁했던 사회학적 시선이 왜 사라졌을까.

사회학적 시선은 '개인'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체계와 '구조'를 우선 본다. 대통령도, 장관도, 기득권 집단도, 특정 네티즌 집단도 분석의 대상이 된다. 현재 부정한 방법으로 기득권을 쥐고 있는 집단이 이런 사회학자들의 분석대상이 된다는 것은 대단히 불편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들 기득권 집단들에 의해 쓸 만한 사회학자들은 "좌파교수"라는 이름하에 강단에서 대부분 쫒겨나고 말았다.

이제는 사회학적 시선으로 우리사회 아니 세계체제를 다시 바라 볼 때가 되었다. 마르크스가 복권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요즘 유행하는 소셜네트워크 혁명과 모바일 혁명은 금융자본주의 막장에 몰린 이 사회를 적절히 설명할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이다. 거대언론에 대항하는 개개인간의 네트워크, 집단지성의 탄생, 이런 도도한 역사적 흐름을 독재적 권력자가 공권력을 동원하여 막는다고 막아지는 것이 아니다. 뚝은 이미 터지고 말았다.

지금 세계적 버블경제붕괴와 생태계붕괴에 직면하여 금융자본주의 시스템의 재정비, 대안 사회, 다른 사회와 다른 삶,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정치경제학적인 '사회학적 시각'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5. 금융자본, 지배권력, 기득권층의 사회심리학적 착각


우리시대에 진짜  재미있는 착각은 지배권력과 기득권층, 특권세력들이 히틀러와 괴벨스의 다음과 같은 농담을 믿고  진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거짓을 하되 믿을 수 없는 거짓말을 하라. 그러면 대중은 처음에 부정할 것이다. 그래도 거짓말을 계속하면 의심할 것이다. 그래도 계속 거짓을 말하면 결국 믿게 된다."

거짓말을 크게 치고 계속 우겨라. 그러면 결국 대중은 믿을 것이다. 웃긴다. 전형적인 MB적 사고가 아닐 수 없다. 그건 옛날 50년대 라디오도 겨우 나올 랑 말랑할 때, 비행기에서 뿌리는 삐라나 먼 곳 장사치들이 가끔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솔깃할 때의 이야기일 뿐이다.

지금처럼 첨단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현장 생중계 되는 실시간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시대에 그와 같은 '거짓말 우기기'가 통할까. 광우병, 4대강사업, 천암함사태, 부동산상승론 등과 같은 거짓말이 먹힌다고 착각하면 이건 뭐 거의 멍청한 수준을 넘어 무모한 사태가 아닐 수 없다. 바로  MB와 어용방송이 대단히 무모한 착각을 하고 있다. 이제 대중은 '믿을 수 없는 큰 거짓말'은 절대 믿지 않는다. 스마트폰의 출현과 함께 스마트대중이 탄생했다.

심리학이 천착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부분인 '개인' 이다. 다양한 개인의 문제를 들여다보면 전체 사회구조가 자연히 보일까. 천만에. 부분의 합이 전체가 아니듯, 전체 또한 부분의 합이 아니다. 부분과 전체가 상보성을 띄기 위해선 개인과 전체에 대한 통합적 사고가 필요하다. 그래서 더욱 개인편향의 ‘심리학 지상주의’가 안타깝게만 느껴진다.

역사적으로 '구조'와 '개인'의 문제는 주요한 사회학적 이슈였다. 세계경제 상승기(돈을 마구 찍어 낼 때)에는 '개인'이 이슈였고 문화와 포스트모던이 유행했다. 세계경제 하강기(돈이 더 이상 돌지 않을 때)에는 '구조'가 문제시되고 정치경제와 리얼리즘이 부각된다. 독재적 금융자본과 정치권력은 어디에 숨는가. 바로 당신, '개인' 뒤로 숨는다. 그들은 심리학을 앞세워 당신을 심각하게 만든다. 소비하는 당신은 불완전하며 착각하는 동물이며 모든 책임은 개인인 나에게 있다고 의식화 시킨다.

월가와 은행은 말한다. "당신돈만은 불어날 거라고.." 이게 신자유주의가 개인을 옭아매는 수법이다. 은행은 모든 사람에게 '당신돈만' 불어난다고 말한다. 사실은 불지도 않고 오히려 줄어든다. 은행 돈만 불어난다. 금융독재는 개인에게 이렇게 환상을 판다. 이 대목에서 자본가들은 인지심리학을 이용해 이렇게 말한다. 잘못은 당신의 '착각'과 '비합리적 선택' 때문이라고.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사실 인지심리학과 가장 잘 어울리는 분야가 '마케팅' 분야다. 월가와 금융자본, 대기업들은 당신의 비합리적 선택과 결정, 착각을 이용해서 절대 더 벌수 없는 새로운 금융상품과 별 차이 없는 자동차와 스마트폰을 판다. 물론 우리는 속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근데 돈이 없다. 돈을 더 찍어낸다고? 그럼 물건 값이 너무 올라 아무도 살 수 없을걸. 이제 세계경제는 막장에 도달했다. 안전벨트 단단히 멜 때가 온 것이다.

 

6. 비합리적 선택과 편견


요즘 인지심리학에서 말하는 비합리적 선택과 수시로 착각하는 존재인 '나'는 그리 새로울 것도 없는 발견이다. '비합리적 선택'이란 '편견‘과 ’고정관념'의 다른 말이다. 편견과 고정관념은 오랫동안 철학의 주된 주제였으며 편견,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실수할 수 있는 존재, 그런 개인이 탈근대적 주체다. '상황'은 '컨텍스트'의 다른 말이고, '착각'은 '오류'의 다른 말이다.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세계에 개인은 얼마나 불완전한가. 그런 불완전한 나의 존재를 찾고자하는 것이 종교, 철학, 인문학이다. 이런 착각과 비합리성을 반성하고 '오류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 비판적 철학이자 자연과학의 덕목이다. 인지심리학에서 말하는 비합리적 선택과 착각하는 개인에 대한 많은 실험들은 충분히 재미있고 깨달음을 주긴 하지만,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오해하지 말아야할 것이 있다. 필자는 심리학과 인지과학의 발전을 환영한다. 다만 과도한 '심리학주의'는 경계하자는 것이다. 위기에 몰린 1%의 월가 자본가와 각국 정치 권력자들에게 사회심리학과 인지심리학은 경영학의 새로운 탈출구를 열어준 복음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결국 소비자에겐 상품을 팔아먹기 위한 꼼수학, 포장학, 바로 그것이다. 발전하는 인지심리학은 환영하지만, 사회구조와 시스템의 문제를 떼어내고, 심리학 하나로 모든 사회현상을 설명하려는 과도한 개체 단위의 심리학주의는 경계해야 한다.

사실 필자는 인지심리학이 경영학과 만나면서, 소비자는 '비합리적 선택'을 하며 쉽게 '착각'하는 동물이라는 점을 이용해 금융상품, 서비스, 제품의 과잉소비를 부추기고, 자본의 음모는 개인의 비합리성 뒤로 숨기며, 사회구조적 문제를 희석시킬 수 있다는 점이 심히 우려된다. 이 부분에 대한 탐구는 이후에도 계속될 것이다.

 

7. 맺는말


요즘 서점에 쫙 깔린 심리학책 잘못 읽다 보면, 내가 '착각'을 잘 할 뿐 아니라 '상황'에 쉽게 휩쓸려 표절, 성추행 정치인, 유명인들의 사생활을 편집증 환자처럼 파고드는 찌질이 변태 악플러가 되는 건 아닌지 끔찍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독재적, 독점적 정치경제 권력에 대한 단순 의혹제기가 심리학적으로 비정상이며 “격리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도 새삼 놀란다. 요즘 필자는 각종 phobia phobia에 시달린다. 나라는 존재는 언제든지 그들 권력자들의 ‘심리학적 시선’에 의해 바스티유 정신병동에 수감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들 심리학자들 말에 따르자면 말이다.

문제는 그들 심리학자들의 사사로운 사회진단에 개인 스스로가 심각해진다는데 있다. 바야흐로 20세기 타인착취의 시대에서 21세기 자기착취, 자기학대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그러나 희망을 버릴 필요는 없다. 사람들은 '편견'과 '잘못된 선택'을 반성할 것이고, 좀 더 합리적으로 삶을 방향을 바꿀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다. 개인들은 그러한 오류로부터 스스로를 성찰할 것이며 사회 시스템의 근본적 결함에 눈뜰 것이다. 인간은 인지심리학적 실수투성이 일수도 있지만, 반성할 줄 알고 오류를 바로잡아 나가는 합리적 동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사회 '심리학의 과잉' 경계해야한다.


2012. 5.



2011년 11월 9일 수요일

쥐 잡는 방법

쥐 잡는 방법 3가지


1)쥐덫

쥐덫은 철물쥐덫이 가격이 저렴하고 영구적며 재활용이 가능하다. 종류가 3가지 정도 있다. 일단쥐덫, 이단쥐덫, 망쥐덫. 망쥐덫(사각모양)은 쥐를 생포할때 사용하며, 큰쥐, 보통쥐, 생쥐 잡을때 성능이 우수하다.

이단쥐덫은 쥐를 죽여서 잡을때 사용한다. 이단쥐덫은 큰쥐, 보통쥐, 생쥐를 잡을 때 사용한다. 일단쥐덫은 큰쥐, 보통쥐는 잘 잡히나 생쥐는 놓치는 경우가 있다. 쥐의 어느 부위가 쥐덫에 걸리는지에 따라서 짧게는 10분, 길게는 1시간 이상 정도 지나서 죽게 된다.



2)끈끈이 설치법

끈끈이는 쥐털이 끈끈이액에 달라 붙어서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는 원리를 이용한다. 끈이는 한번 잡으면 재활용은 하지 못하고 쓰레기통속으로 같이 버린다. 1회용이다.

작은 쥐는 쉽게 잡을수 있지만, 큰쥐는 끈끈이에 붙어도 떨어져서 도망가는 경우가 있다.끈끈이는 설치하고 바로 잡아야 잘 잡힌다. 몇일이 지나면 끈끈이액이 말라서 성능이 떨어진다.


3)쥐약

쥐약은 쥐가 먹으면 죽는다. 조금 많이 먹으면 바로 죽는다. 그러나 개와 고양이들이 먹어서 다른 동물까지 죽게 할수도 있다. 외국에서 쥐약사용은 금지다.

쥐약을 먹은 쥐는 주로 밝은 곳으로 나와서 죽는다. 간혹 어두운 구석에서 죽으면 시체는 찾을 수가 없다. 썩어 없어질 때까지 냄새가 난다는 단점이 있다.

쥐를 잘 잡으려면 쥐가 좋아하는 음식을 잘 알아야 한다.

쥐는 잡식성 동물이기 때문에 아무거나 다 잘 먹는다. 냄새가 잘나는 멸치, 삶은 고기가 좋으며, 햄, 소시지, 계란, 김, 새우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는 반찬류를 먹이로 쓰면 된다.

쥐를 잘 잡으려면 철물쥐덫, 쥐약, 끈끈이 중에 용도 및 상황에 따라서 적절한 수단을 잘 선택해야한다. 상황이 비슷하다면 가격도 저렴하고 영구적으로 사용할수 있는 철물쥐덫이 가장 좋다.

철물쥐덫이 효과없는 큰 쥐의 경우에는 쥐약이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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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21일 목요일

금산분리법이 폐지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금산분리법 폐지 합의했다는데...
일반 지주회사에 금융계열사 소유의 길을 터주는 공정거래법 개정안 처리문제가 시급한 현안문제로 떠올랐다.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은 4월 국회에서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기로 정부와 여야가 합의했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20일 오후 (개정안을) 통과시키기로 잠정 합의했다"며 "28, 29일 이전에 법안심사소위를 한번 더 열어 법안을 통과시키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합의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공정거래법 개정안 통과가 불가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박영선 의원도“공정거래법이 개정되면 특혜를 받게 될 기업이 분명히 있는데 그냥 국회가 통과시킬 수 없지 않으냐”며 “공정거래위원회가 대안을 마련하겠다고 해서 28일 또는 29일께 소위를 다시 열어 논의해 보자고 한 것이지 합의가 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2008년 입법예고된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국회 법사위에 계류돼 있는 상태. 이 법안은 일반지주회사로서 금융계열사를 소유하고 있던 에스케이그룹에 사실상 특혜를 주는 법안이어서 많은 논란을 빚어왔다. 에스케이는 이번 국회에서 법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6월 말까지 에스케이증권 보유 지분을 매각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이상은 4월 21일 한겨레뉴스 요약이다.

일반 지주회사에 금융계열사 소유의 길을 터주는 금산분리법이 폐지되면 어떤일이 벌어질까? 금산분리법이 폐지된다면 재벌공화국, 삼성공화국은 불보듯 뻔하다. 2009년에 그려진 아래 만화는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고자하는 금산분리완화법이 시행되면 벌어질 수 있는 사태에 대해 알기쉽게 설명하고 있다.




2011.04.21.

2011년 4월 8일 금요일

한완상 전 총재의 '수난절 편지'

한완상 교수의 기도


사회과학자, 행동하는 양심, 자원봉사자의 귀감 등으로 별칭 되는 한완상 대한적십자사 전(前) 총재. 그가 지난 2008년 자신의 설교들을 한데 모아 내놓은 <예수 없는 예수교회>에는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역사적 예수(실물 예수)'의 체취와 숨결과 비전이 들어 있습니다. 제가 아끼는 도서 목록 1호로 분류해 놓고 반복해서 읽는 이유이지요. 오늘도 실물 예수님이 몹시 생각나서 책꽂이에서 꺼내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본문을 읽느라 미처 읽지 못한 긴 편지 '참회하는 마음으로 쓴 수난절 편지' 한 장을 발견했습니다. 부활주일을 앞두고 여러 모로 분주할, 한국교회, 특히 대형 교회 담임목사들이 조용한 시간을 내어 꼭 일독했으면 좋겠다 싶어 이렇게 소개해 봅니다. -필자 주(뉴스앤조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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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평화의 예수님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절기를 앞두고, 1세기 닫힌 유대 사회에서 역사적 인물로서 당신이 친히 겪으셨던 외로움과 괴로움, 억울하고 부당했던 고통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과연 저 같은 인간이 거의 2,000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주님의 그 아픔에 역지사지할 수 있는지 자문하며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주님보다 거의 두 배나 긴 시간을 살았지만,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삶이었기에 주님의 발자취를 거울삼아 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싶습니다.

비록 2,000년 전에 주님이 겪으셨던 고통이었으나, 지금 저는 제 자신이 그때의 가해자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만일 제가 1세기 유대에 살았다면 주님을 율법주의 잣대로 비판하고 심판하려 했던 당시의 지식인과 종교 지도자의 반열에 섰을 가능성이 크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주님에게 손가락질과 삿대질을 해 대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서 제 모습을 보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역사적 알리바이는 뚜렷하더라도 저는 주님의 억울한 수난에 무관하다 말하기 어렵다고 느낍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뒤 초대교회는 로마의 잔혹한 학정 밑에서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실존적 체험과 그 체험에서 나온 새 희망과 믿음을 꿋꿋이 지켜 냈습니다.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기에, 저는 오늘도 예수따르미답게 제대로 못 사는 자신을 나무라며 부활의 주님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처럼 살기에는 21세기 제 삶이 너무 풍요롭고 너무 안정되어 도무지 주님처럼 자기 비움을 이룰 수 없음도 솔직히 고백합니다.

그런데 초대교회가 세속적 인정을 받아 힘과 부를 취하게 되자, 예수 운동은 점차 약해지고 역사적 예수의 놀라운 말씀과 행적은 교리의 높은 담벼락에 가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케리그마는 교리로 포장되었고, 주님의 감동적인 역사적 삶은 희미해진 듯합니다. 특히 초대교회가 역사적 예수를 기독교화하는 과정에서 주님이 실제로 겪었던 그 역사적 아픔은 신학적으로 추상화되고 만 듯합니다.

그뿐입니까? 주님의 수난, 죽음, 부활에 대한 교리적 담론이 변증론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게 되면서 점점 교회는 독선과 교만과 비관용의 제도로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힘 있는 중심 제도로 뿌리내린 교회는 주님의 이름으로 끔찍스러운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라는 제도와 교회라는 공적 기관이 교리로 고착된 하나의 그리스도상(像)에 어긋나는 모든 예수 담론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신화의 옷을 입은 교리의 그리스도는 갈릴리 예수로부터 아주 떨어져 나가고 말았습니다. 주님의 몸이라고 주장해 온 교회가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을 심각하게 분열시키고 괴롭혔다는 역설을 알기에 저는 단순히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것을 너무나 부끄럽게 생각하기에 이렇게 주님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갈릴리의 예수님, 사랑하고 존경하는 역사의 예수님

따지고 보면 주님의 말씀 하나하나, 주님의 행적 하나하나가 주님을 위험한 인물로 낙인찍었던 당시 종교 지도층으로 하여금 주님에게 의심과 차별, 억압과 비난을 쏟아붓게 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삶의 방식 자체가 기득권층에게는 위험하고 혐오스러운 떠돌이 삶으로 인식되었지요. 주님은 자기 주소로 된 집 한 채 제대로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주님은 길바닥의 존재로 사셨습니다. 하늘을 이불 삼고 땅바닥을 요로 삼아 살았습니다. 정말 처절하게 외로운 떠돌이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탄식하셨겠지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고 말이지요. 주님의 삶은 여우와 새보다 더 외로운 떠돌이 삶이었습니다. 주님의 삶에 견주어 우리의 삶은 너무나 여유로워 도무지 주님의 그 고독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주님은 고향 사람들에게도 배척을 받았습니다. 이른바 지역감정을 철저히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고향 나사렛에 있는 회당에서 첫 메시지(취임사)를 선포하신 뒤, 하필이면 반유대적인 발언을 하시어 유대 선민의식과 자존심을 심각하게 훼손시켰습니다. 하마터면 동네 사람들에게 떠밀려 낭떠러지에 추락사당할 뻔하지 않았습니까? 지역감정을 들먹여 정치적 자리 하나 얻으려는 우리네 추한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주님의 고결한 자세를 새삼 우러러 보게 됩니다. 고향 사람에게 왕따당하셨던 주님의 아픔을 지연과 혈연을 소중히 여기는 한국 크리스천들이 제대로 이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부끄럽습니다.

게다가 주님을 따른다는 제자들, 대체로 무식했던 열두 제자들의 한심한 정신 자세는 어땠습니까? 그들이 주님을 따르기로 결단했을 때부터 그 동기는 퍽 세속적이었던 듯합니다. 예수님이 집권하여 왕이 되면 한자리라도 얻어 걸칠 것을 계산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또 그들은 도무지 주님의 말씀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쉬운 비유의 말씀도 알아듣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짧은 경구의 뜻도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주님을 따르는 열둘 중에는 주님을 반대 세력에 팔아넘긴 가롯 유다가 있는가 하면, 목숨을 내놓고 끝까지 따르겠다고 핏대를 올리며 충성 맹세를 했다가 종내 비겁하기 짝이 없는 짓을 하고 만 베드로가 있지 않았습니까? 저는 최후 만찬에서 가롯 유다를 쳐다보시는 주님의 외로운 눈빛을 가끔 생각합니다. 저 같으면 유다의 뺨이라도 시원하게 갈겨주면서 '이놈, 정신 차려!' 하고 야단쳤을 텐데, 주님은 유다의 흑심을 꿰뚫어 보면서도 사랑과 연민이 교차하는 눈빛으로 그를 그윽하게 쳐다보시면서 오히려 한없이 안타까워하셨겠지요.

가롯 유다는 로마제국을 꺾고 민족국가를 세우려 했던 열혈 민족주의자들의 결사체 요원이었기에 예수님의 로마 대응 방식에 실망했을 테지요. 그가 과격한 민족 투쟁 의지 때문에 주님을 배신했다면, 저 역시 그같은 상황에서 제2의 가롯 유다가 절대로 안 될 것이라 장담할 수 있을까요? 주님은 가롯 유다의 뜨거운 민족애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기에 그를 더욱 연민의 눈빛으로 바라보신 것이 아닌지요? 게다가 그 배반 행위로 그가 겪을 엄청난 정신적, 역사적 저주와 고통을 미리 아시고, 그것을 더욱 안쓰러워하셨던 게 아닌가요? 주님의 마음을 이제는 얼마간 이해할 듯합니다.


너무나 인간적이기에 인격적인 예수님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겪었을 그 외로움과 괴로움을 이 수난절에 새삼 되새겨 봅니다. 주님의 입장에 서 보고 싶습니다. 사실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 아니 하나님과 같은 전지전능하신 분으로만 믿는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의 모습은 조금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감동적인 사건도 될 수 없겠지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죽음을 초월하시는 분인데, 무엇 때문에 수난을 앞두고서 불안해하거나 떨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로만 주님을 우러러 본다면, 겟세마네는 견디기 어려운 고뇌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인간적 외로움과 괴로움을 설명해 주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예수 잘 믿는' 신자가 되어 주님을 일방적으로 신격화하여 주님의 외로움과 괴로움을 신학적으로 추상화시킨 잘못이 부끄럽습니다. 주님은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솔직히 표현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따로 떨어져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는 너무나 처절했습니다. 얼굴에서 피와 땀이 흘러내릴 만큼 결사적이었습니다. 주님의 그 모습, 우리처럼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똑똑히 보게 됩니다. 또 봐야 합니다. 나아가 그 아픔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문득 1978년 2월 말 유신 체제 하에서 함석헌 선생이 동지들과 함께 작성한 3․1절 성명을 읽다가 연행된 사건이 떠오릅니다. 함 선생께서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저는 이제 내 차례구나 여기며, 그날 밤 한순간도 자지 못해 불안에 떨다가 주일 아침 일찍 교회에 가서 홀로 기도했습니다. 체포되기 직전의 순간으로 생각했기에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과 어느 정도 역지사지(易地思之)할 수 있었습니다. 피와 땀을 흘리지는 못했지만, 잔뜩 겁을 먹고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기에 주님께 힘과 용기를 달라고 매달렸습니다. 물론 주님의 그 괴로움과는 견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의 작은 사건으로 저는 겟세마네에서 주님이 보여 주신 실존적 몸부림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아픔은 단지 로마 당국에 체포되어 십자가형에 처해지리라는 예감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 중에서도 쓸 만하다고 여긴 핵심적인 세 사람,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가신 것은 주님의 아픔을 그들과 함께 나눠 갖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선택된 세 제자는 스승의 아픔을 외면하는 데도 역시 출중했습니다. 스승은 피땀 흘려 하나님께 매달리고 있는데, 그들은 잠을 이기지 못해 연신 고개를 떨구고 있었습니다. 긴장이 되었다면, 인간적 고뇌가 깊었다면, 스승의 아픔을 체휼했다면, 어찌 그렇게 잠이 쏟아졌겠습니까? 정말 한심한 제자들 아닙니까? 이런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신 주님도 정말 딱하다고 생각됩니다.

문제는 주님의 기도에 있습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지난 세월 크리스천과 제도 교회와 기독교는 그리스도에 관한 신조만 주목하고 강조했습니다. 주님의 경건한 종교적 믿음만을 강조하면서, 역시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며 주님을 우러러 왔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실존적 고뇌와 진솔한 인간적 고백을 외면해 왔습니다.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아픔은 바로 우리의 아픔과 같은 것으로 이 표현에 농축되어 있지 않습니까? 우리 보통 사람들의 아픔과 같기에 주님의 솔직한 이 기도가 더욱 뜨겁게 연약한 우리 인간의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린아이가 위험에 직면하여 아빠, 엄마를 찾는 심정으로 아바(Abba) 하나님을 외치신 주님의 너무나 인간적인 호소에 주님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

주님은 십자가의 엄청난 고통, 육체적․정신적․종교적․사회적 저주와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습니까? 주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웃으며 죽음의 잔을 들어 마시는 거룩하고 간 큰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우리처럼 죽음의 위협 앞에 극도로 초조해하며 불안해하는 그런 인간적인 분이었습니다. 그 고통은 너무나 진솔한 인간의 아픔이요, 인간적인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두려움이 컸으면 땀과 피가 비 오듯 얼굴을 적셨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아픔을 연기자의 거짓 아픔처럼, 절대 전능하신 분의 하찮은 감정처럼 간단히 처리해 왔음을 고백합니다. 적어도 수난절에나마 역사적 예수가 온몸으로 가슴 저리게 느꼈던 죽음의 공포와 불안을 우리의 것으로 체휼(體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음이 부끄럽습니다. 특히 주님의 실존적 아픔을 기독교 교리 입장에서 왜소화하고 탈각시켜 버린 잘못을 회개합니다.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외치셨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절규를 신학화하여 인간적 아픔의 극치를 둔화시킨 저희들의 안일한 신앙 행태를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이미 구약에서 예정된 계획에 따라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기계적으로 연기한 것처럼 받아들임으로써, 주님의 아픔을 신앙의 이름으로 너무나 가볍게 다루었습니다. 사실 예수의 절규를 연약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부르짖게 되는 원망과 절망의 외침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를 우리와 같은 분, 비겁한 우리들의 참된 벗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도 보통 사람의 아들처럼 애절한 절규를 내뱉을 수 있음을 보여 줌으로써, 보통 사람들에게 더 큰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랑과 평화의 그리스도 예수님

이제 저는 역사적 예수를 교리의 옷을 입혀 박제해 버린 우리 기독교 신자들의 잘못을 회개하고자 합니다. 역사적 예수는 유대 율법주의자들과 로마제국에 의해 고난당하셨을 뿐 아니라, 신앙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제국의 국교로 변질된 기독교에 의해서도 심각하게 괴롭힘을 당하셨습니다. 교회가 길고 긴 시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저지른 반인륜 범죄를 어떻게 일일이 열거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행된 끔찍한 범죄가 생겨날 때마다, 주님의 아픔은 2,000년 전 골고다의 십자가 위에서 겪으신 아픔보다 더 컸을 것입니다. 정말 그리스도 예수께 어떻게 사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타계한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가톨릭교회의 엄청난 잘못에 대해 개괄적으로 회개한 적이 있습니다. 비록 추상적이고 개괄적인 참회라며 일부 유대인이나 타 종교인들이 비판했지만, 그간 교황의 무오설을 믿어 왔던 가톨릭교회가 교황의 입을 통해 그같은 회개를 토해 내는 모습에 저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간 기독교(넓은 뜻에서 신․구교 모두)는 진리와 교리의 이름으로 타 종교에게 박해를 가했고, 선교의 이름으로 토착민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했으며, 기독교의 틀 안에서도 이른바 정통 교리에 위배되는 신앙 행위를 가혹하게 처단했으며, 종교재판을 통해 많은 신자들을 박해했고, 마녀사냥으로 특정 여성의 신앙 행위를 무자비하게 고문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죄악을 더 구체적으로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히틀러와 스탈린이 수백만 명을 숙청하고 살육하는 동안 그 끔찍한 범죄를 구경만 했던 경건한 기독교인과 교회도 그 무관심에 대해 뼈아픈 회개를 해야 합니다. 바로 그같은 교회의 비관용과 무관심, 노골적인 고문 행위야말로 바로 역사의 예수와 부활의 그리스도를 모두 따돌리고 고문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역설적이게도 크리스천들은 제도 교회의 교리적 틀 안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그리스도 예수를 괴롭혀 온 셈입니다. 왜 이런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을까요?

예수의 처형을 목격하면서 비겁하게 달아났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뒤, 담대한 죽음의 증인으로 변화된 것은 분명히 기독교를 탄생시킨 놀라운 은총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가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케리그마 복음이 역사적 예수의 감동적인 삶(말씀과 행위)에 무관심하거나 그것을 무시하면서 문제는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부활 이후의 예수를 그리스도로 격상시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희미해지거나 실종되고, 그리스도 담론만이 단단한 교리의 옷을 입은 변증적 신학 체계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교리는 차별과 비관용의 기준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리스도 담론, 즉 기독론은 이단을 경계하면서도 역설적으로 그것을 양산했고, 교회와 교인을 끊임없이 분열시켰으며, 그 분열에 따라 이른바 힘을 지닌 주류는 비주류를 줄기차게 차별하고 박멸하려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종교재판, 마녀사냥, 십자군 전쟁의 참화와 죄악이 나타났고, 마침내 해외 선교의 이름 아래 기독교 제국주의 정책이 토착민을 참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모든 것이 신성한 이름, 곧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저질러지고 정당화되었습니다. 너무나 끔찍한 고통을 주님에게 덮어씌우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참으로 한심한 것은 아직도 기독교와 교인들이 이 잘못을 제대로 깨닫지도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국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했다는 한국 개신교회는 부끄럽게도 교회 분열을 통해 가속적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마땅히 하나가 되어야 할 예수님의 몸은 교파 교리와 교파 내 복잡한 이해관계로 여러 갈래로 찢기고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예수파와 그리스도파가 싸우기도 했습니다. 예수교 장로교단과 기독교 장로교단의 싸움, 예수교 성결교단과 기독교 성결교단의 싸움이 그러합니다. 장로교단도 한국에서만 100개 이상으로 분열되었습니다. 이런 교파주의는 당신의 몸에 무수한 분열의 창칼을 들이대는 것과 같습니다. 얼마나 아프셨습니까? 주님, 저희를 용서하소서. 이제 부활절을 앞두고 주님의 고난이 지닌 참뜻을 깊이 깨닫고, 우리가 주님을 더욱 아프게 한 장본인임을 고백하게 하소서.


갈릴리 예수님, 생명과 부활의 그리스도여!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따르고자 합니다. 예수따르미가 되고자 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담백한 삶, 비움의 삶, 체휼의 삶을 닮기에는 21세기 자본주의 정보화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가 너무나 부유하고, 너무나 복잡하고, 너무나 탐욕스러움을 고백합니다. 그래도 갈릴리 예수를 닮는 길만이 인류가 구원받는 진리의 길임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 길에 당당히 나서도록 우리에게 소망과 비전, 용기와 능력을 허락하소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그 힘과 비전을 내려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역사적 예수를 따르는 데는 부활의 그리스도 능력이 절대로 필요함을 고백합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을 허락하소서.

우리 자신이야말로 21세기의 바리새인, 서기관, 대제사장, 로마 당국과 같은 존재임을 참회하게 하소서. 1세기 유대 땅에서 역사적 예수를 괴롭혔던 이들처럼, 21세기 정보화 세계에서도 크리스천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님을 괴롭히고 있음을 회개하게 하소서. 이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지금 여기서 예수의 삶을 살 수 있게 하소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리면서까지 죽음의 고통을 피하고자 몸부림치셨던 주님의 모습에서 우리 연약한 인간들이 새삼 용기를 얻고, 주님의 그 아픔을 오늘 여기서 체휼하게 하소서. 오늘 이곳이 겟세마네 동산이 되어 "이 잔을 피하게 해 주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 뜻이 이뤄지게 하소서"라고 하나님께 피땀으로 외치셨던 인간 예수를 뜨겁게 만나는 은총의 자리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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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27일 일요일

보이지 않는 고릴라와 천안함

Selective Attention Test(1999)




위 실험은 1999년 하버드 심리학과에서 행해진 유명한 실험이다. 흰 옷 입은 학생 3명이 한팀이고 검은 옷 입은 3명이 다른 팀이다. 각 팀은 서로 같은 옷을 입은 사람에게 농구공을 패스하는데, 검은 옷 팀의 패스는 무시하고, 흰옷 팀 사람들의 농구공 패스 횟수가 몇 번인지 세면된다. 주어진 시간은 1분이고 주의력을 집중해서 센다.

패스횟수는 15회가 정답이다. 크리스토퍼 차브리스와 대니얼 사이먼스 두 심리학자는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위 동영상을 보여주면서 마지막에 질문한다. "고릴라를 보았습니까?" 놀랍게도 실험참가자 50%가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고 답한다.




이 실험은 일명 "보이지 않는 고릴라"라는 실험으로 대단한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다. 세계 곳곳에서 실험한 결과 50% 정도의 사람은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 고릴라와 검은 옷 사람들이 색깔이 비슷했서 착각할 수도 있겠다 싶어 다른 학자들이 빨간 고릴라를 출현시켰지만 30% 정도의 사람들이 여전히 고릴라를 전혀 보지 못했다.

위 실험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바라보는 것'과 '보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한 실험이었다. 우리가 무엇인가 바라본다고 해서 바라본 대상을 다 인식하는 것은 것은 아니다. 단지, 보이는 것만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우리 시선에 들어온 장면 모두를 우리 뇌는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 뇌는 시선에 들어온 정보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용량의 한계가 있단다.

두 심리학자는 이런 현상을 '무주의 맹시"라 불렀다. 흔히 사람들은 우리가 두 눈으로 직접 본 어떤 대상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인식할 수 있을 거라 착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두 눈으로 분명히 보았지만 전혀 보이지 않는 경우도 다반사로 일어난다.

쉬운 예로 핸드폰 통화를 하면서 시청에서 신촌까지 운전한 당신이 핸드폰 통화를 끝냈을 무렵 어떻게 운전해 왔지는 전혀 기억할 수 없는 것도 '보이지 않는 고릴라 현상'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쯤되면 우리가 확실하게 여기는 어떤 기억 속에도 "보이지 않은 고릴라"가 한 번 쯤은 지나갔을 수도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현상은 일상의 사소한 기억에서부터 사회적인 큰 사건에서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같은 범죄사건을 목격한 목격자들의 진술이 서로 엇갈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최근 출판된 [보이지 않는 고릴라]라는 책에는 아주 중요한 사회적 사건의 한 예를 들고 있다. 2001년 2월 9일 발생한 미국 핵잠수함과 일본 어선의 충동 사례가 그것이다.




"조지 부시의 임기 중 처음으로 발생했던 중요한 국제적 사건을 기억하는가? 사건은 대통령이 취임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던 무렵인 2001년 2월 9일에 발생했다. 오후 1시 40분쯤 하와이 근해에 있던 미해군 핵 잠수함 그린빌호의 함장 스코트 워들 사령관은 잠수함을 빠르게 잠수시키는 긴급기동 훈련인 '긴급 잠항'을 지시했다.

사령관은 이어 '메인 부력탱크 긴급부상'을 지시했다. 메인 부력탱크에 든 물을 고압의 공기로 밀어내어 최대한 빠른 속도로 잠수함을 수면 위로 올리는 작전이다. 영화<붉은 10월>에도 나오는 이런 군사 작전에서는 잠수함의 선수가 수면 위로 크게 튀어 오른다.

그런데 그린빌호가 수면으로 급상승하던 순간, 엄청난 굉음이 울리며 함정 전체가 흔들렸다. "맙소사!" 위들 사령관은 말했다. "도대체 위에 뭐가 있나?"

아주 빠른 속도로 수면위로 상승하던 그 잠수한 바로 위에 일본 선박 에히메마루(愛媛丸)가 있었던 것이다. 북극 지역에서 유빙을 뚫고 올라 갈 수 있도록 특별히 제작된 그린빌호의 수직타는 선박을 두 동강 내고 말았다. 연료가 새면서 배에 물이 차올랐고, 불과 몇 분 만에 어선은 기울여졌다.

무거운 선미 쪽이 먼저 가라앉자 배에 있던 사람들은 뱃머리쪽으로 앞 다퉈 달려갔다. 많은 사람들이 부명보트에 올라 구조되었지만 선원 세 명과 승객 여섯 명이 죽었다. 반면 그린빌호는 경미한 손상만 입었을뿐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뭐가 잘못이었을까? 최첨단 음파 탐지기를 갖추고 베테랑 승무원이 조정하는 현대식 잠수함이 어째서 그렇게 가까이 있는, 거의 60미터에 달하는 큰 선박을 발견하지 못한 걸까?"


위 사건은 흡사 미핵잠수함과의 추돌설에 등장하는 "천안암 사건"과 거의 유사하다. 미핵잠수함과 천안함 충돌설이 사실이라면, 미핵잠수함 함장의 잠만경엔 '고릴라'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그린빌호의 함장 스코트 워들 사령관은 부상하기전 잠만경으로 360도 관찰하였으나 일본어선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내용이 미국 교통안전위원회가 작성한 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사령관은 나중에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잠만경으로 관찰하면서 "배를 찾고 있지도 않았도, 배가 있을거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배를 찾고자 하지 않았기에 바로 근처에 있는 일본어선이라는 고릴라에 시선이 순간적으로 머물면서도 배를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천암함 사건과 관련해서 미핵잠수함과 천안함의 충동설이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미핵잠수함 내부로 들어가 무슨일이 벌어졌는지, 2001년 그린빌호의 예를 통해 시각을 바꾸어 천안함 사태를 분석해 보는 것도 의미있겠다.

충동설을 전제로, 당시 서해상의 미핵잠수함은 소나가 작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함장이 야간 투시 잠만경으로 360도 관찰 후에도 바로 근거리에 있는 천안함이라는 고릴라를 보지못했을 것이다.

"미핵잠수함 그린빌호가 급상승하는 순간, 엄청난 굉음이 울리며 함정전체가 흔들렸다. '맙고사!' 위들 사령관은 말했다. '도대체 위에 뭐가 있나?'"

뭐가 있긴 "보이지 않는 고릴라"가 있지.
고릴라가 보이지 않는 순간 사건은 발생하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일본 어선과 천안함은 "보이지 않는 고릴라"였는지도 모른다.


※ 이 글은 [보이지 않는 고릴라](김영사)에서 본문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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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21일 월요일

종교적 체험과 자율신경계

편도체에 들어앉은 하나님


라캉은 의식과 무의식도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말한다. 생각, 사고, 잡념, 고민, 걱정, 불안 등도 대뇌피질 전두엽에서 직간접적 경험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전두엽에 구조화된 의식은 동물뇌, 정서뇌라 불리는 변연계(특히 편도체)에 영향을 주고 걱정, 불안, 안도, 평안함 등을 일으킨다.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생각은 일종의 강박증, 노이로제, 집착증인데, 프로이드는 종교를 '집단신경증'이라 했다.

기도, 명상, 수련, 참선 등은 이런 전두엽의 논리적, 언어적 사고를 중단하고 우리 의지와 독립된 자율신경계를 안정상태로 조절해서 평안에 이르는 게 하는 방법들이다. 자율신경계를 우리 의지대로 조정하는 방법은 '호흡법'밖에 없는데, 그래서 명상, 참선 등을 행할 때 자신의 호흡에만 집중하는 것이 그런 연유에서다.

과거에 슈가레이 레너드라는 복서가 있었는데 이 선수의 반사 신경이 얼마나 빠른지 보통사람의 2배 정도였다고 한다. 옛 무사들의 지독한 수련은 반사신경을 증진시키 위한 것이었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칼놀림. 대뇌에서 보고 판단하고 명령을 내리기 전에 척수에서 명령을 내려버린다. 이것은 척수반사다. 훈련에 따라 운동선수들의 반사신경은 보통사람보다 2배 정도 증진시킬 수 있다고 한다.



깨달음, 무념무상, 견성, 종교적 체험은 대뇌피질, 전두엽의 논리적, 언어적 사고를 끊고 스스로 뇌의 변연계가 관장하는 자율신경계를 컨트롤 할 수 있다는 것의 다른 말이다. 이런 조절능력은 훈련, 수련을 통해 충분히 가능하다.

어떤 종교적 깨달음이 반드시 좋은 것인지는 이론이 있을 수 있다. 깨달음의 댓가로 전두엽의 논리적, 언어적 사고를 중지한 것이기에 구체적 삶의 변화를 합리적으로 판단하기에는 훈련이 부족하고 현실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능력은 저하될 수밖에 없다.

현실문제와 연관된 전두엽의 추리능력을 포기했으므로 당면한 가족사나 정치 경제 사회 문제에 대한 판단능력이 떨어지므로 현실 괴리감이 발생할 수도 있다. 흔히 현실감각이 없다, 현실도피자, 이상주의자, '도튼 중' 같다는 말을 듣곤 한다. 득도, 영성, 구원을 받을 것인지, 범부로 생활세계를 이성적으로 따져가며 살 것인지는 선택의 문제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행위와 구조가 일으키는 부조리를 논리적 사고로 판단하는 것을 '불의'라 할 때, 불의에 분노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불의 때문에 화병이 나는 것도 문제다. 이 둘을 잘 조절하는 것이 동서고금의 교육원리(지덕체의 함양)다. 이 둘을 잘 조합한 이가 누구였는지는 잘 모르지만 성인으로 추앙받는 이들이 그들이 아닐까.

"깨달았다“, ”성령의 은사를 입었다“, ”견성을 이뤘다"는 말의 다른 말은 전두엽의 언어적, 논리적 사고행위를 중단하고 자율신경계의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게 충분히 훈련 받았다,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바꿔 말하면 현실세계를 언어적, 논리적으로 엄밀하게 파악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도 된다.

한 개인의 명상체험과 종교적 체험은 소중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개인적 체험만으로 무리하게 현실세계를 해석하려할 때, 전두엽 사회에 편도체 조절자가 무리하게 끼어들 때 문제가 발생하곤 한다. 개인적 특이체험의 일반화는 맹신과 독단을 낫는다.“일본지진은 예수를 믿지 않아서", “도를 아십니까”, “어리석은 중생들”이라는 말을 함부로 뇌까리는 것에서 그런 행태를 볼 수 있다.

필자는 아무래도 배부른 달마대사 보다는 가난한 인간이 낫지 싶다. '인간'이란 말에서도 나타나듯이 나란 존재는 타인의 얼굴을 통해 형성된, 연대하는 주체(레비나스)이기 때문이다. 괴롭고 고통스럽긴 하지만, 전두엽의 탐구와 비판, 문제해결 등에서 얻는 '성취감'이라는 놀라운 재미를 포기하면서까지 '자율신경계 조절자'가 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하나를 얻으면 분명 하나를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종교적 행위는 대부분의 무신론자들도 일상적으로 행하고 있다. 꽃꽂이, 낚시, 여행,모형수집, 뜨개질, 바둑, 개키우기, 연필 돌리기, 책수집, 연예인 팬활동, 악기연주, 음악감상, 트위터질 등. 일상에서 매일 반복되는 특정행위,징크스, 집착, 소아병적 애착 또한 일종의 종교적 행위(E-프롬)일 수 있기에, 타인에 해가되지 않고 내가 즐거워 하는 일의 달인이 될 수 있다면 이것 또한 성스러운 종교행위가 아닐까. 생활자체가 도 닦는 것, 기도하는 것이라는 말, 참으로 일리있다. 천국과 도가 뇌의 편도체에 있는 것이라면, 도는 산에 있지 않고 길에 있으며 천국은 너의 마음 속에 있고 한 곳에 머물지 아니하고 도처에 편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나를 깊이 들여다본다는 것은 나의 살아있는 동물성 Vital Sign을 느껴 본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전두엽에서 논리적, 언어적으로 표상된 경험을 반영한 변연계의 감정의 소용돌이를 조용히 지켜본다는 것이고, 자율신경계가 나를 어떻게 난도질하는지 유심히 바라보는 것이다.

기도를 통해 구원을 얻고 싶거나 명상을 통해 도인이 되고 싶거나 참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싶다면 ‘호흡’에 집중하면 된다. 호흡이야말로 내 의지로 자율신경계에 접근하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10년만 하면 소원성취할 것이다. 근데 그런 종교적 결단 없이 범부들도 10년 정도 한 가지 일에 매진한다면 그 분야에선 누구나 달인, 도인이 될 수 있다.

천국과 도를 구함에 있어서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없다. 차이가 있다면 한쪽은 100년 동안 아름다운 자연 다큐멘터리 영화 한편만 줄창 보는 반면, 한쪽은 액션, 스릴러, 미스테리, 멜로, SF, 드라마 모든 영화를 입맛에 맞게 다양하게 골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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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4일 금요일

불법조업 중국어선 '조준사격'을 우려한다

< 불법조업 중국어선 '조준사격'을 우려한다 >


필자의 트위터 글, "비무장 민간인에게 '조준사격'? 심각한 국제법위반 아닌가? 조준에 맛드렸군화. RT @hanitweet: 해경, 불법조업 중국 어선에 첫‘조준사격’ http://bit.ly/g0dpoo" 에 대한 비판글이 트위터로 10개 이상 올라오고 있다.

한겨레 기사를 링크하고 간단한 맨션을 단 것인데 어디서 보았는지 윗 맨션에 대한 비판 글들이 아이폰에 간간히 뜬다.

일일히 나의 의견과 오해 소지에 대해 트위터리안들께 답글을 보내긴 했으나 [다음]포탈 사이트 해당 기사 밑에 소셜웹이라는 트위터 타임라인에 계속 떠 있기 때문에 뒤늦게 본 이가 똑 같은 비판글을 보내온다.

같은 답장을 계속 보낼 수는 없기에 나의 트위터 의견을 아래 모아보았다.

이번 해경 '조준사격'에 대한 나의 입장은 절대 반대한다,이다. 이유는 아래 트윗터에 쓴 글 참고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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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경, 불법조업 중국 어선에 첫 ‘조준사격’, 이 기사 제가 우려한 것. 과거 도끼든 중국선박들 '조준사격' 안 하고 어떻게 단속했는가. 아덴만식 과잉진압 안 했으면하구요. 60년4.19, 80년 광주, 튀니지, 리비아, 모두 '조준사격'이 문제였다는 걸 강조한 것예요.


예! 우리 해경 입장도 충분히 생각합니다. 제가 우려하는 것은 저는 '위협사격'과 '조준사격'의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자국정부가 있는 외국인에 대한 '조준사격'은 외교적 문제로 커질 수 있으니 '조준사격'외의 다른 방법을 쓰는 것이 좋을 것 같구요. '조준사격'이 단속의 주된 방법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외국인이 국내에서 범죄행위를 했다해도 '조준사격'하진 않지요. 법절차를 통해 범죄행위를 묻지 않나요? 중국입장에서 중국인을 '조준사격'하는 것은 중국을 조준사격하는 것으로 여길겁니다. 우리 불법어부들을 중죄도 아닌데 미국,일본,중국이'조준사격'한다면, 사실 그런예가 있는지 모르지만, 이건 아니다 싶군요. 


제가 잘 모르지만, 배에는 망치,칼,도끼,나무봉, 이런게 많지 않나요. 뭐 무장한 민간인일 수도 있지만, 다리에 총맞은 중국어민이 '조준사격'에도 불구하고 만에 하나 죽는다면, 국제법을 어긴 불법 중국어선도 국제적 비난을 받겠지만, '조준사격'으로 불법조업 외국인을 죽인 나라는 더 심한 국제적 비난과 책임을 추궁당하지 않을까요? 경찰이 정당방위로 총을 쏘는 것은 어디까지나 경찰 개인 생명권 차원의 정당방위로 봐야지,불법범죄 외국인에 대한 '조준사격'을 공권력의 '원칙'으로 삼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그럴일이야 없겠지만 사망사고 나는 순간에 해경훈련문제와 동시에 외교분쟁화할 우려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조준사격' 그 취지는 이해하나 실행하지말고 다른 방법을 모색해 보았으면 합니다. 


[다음]포탈 트위터 쇼셜왭에 <'해경,불법조업 중국어선에 첫 조준사격'>기사 밑에 제가 쓴 '조준사격'비판글이 쫙~. 반대의견에 집중포화 맞고 있네요. [다음] 밉네요. 이기사 비판했다고 기사밑에 걸어놓는짓 하지마세요. 이 정도 기사 비판못하면 그게국민인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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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트위터 글 받침, 띄어쓰기등 내용에 지장 주지 않는 선에서 약간 수정하였다.
일단, 여기까지 내 의견 올리고 좀 더 디테일한 분석글은 시간나는 대로 업데이트 시키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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